왕이 되는 것보다, 왕으로 인정받는 일이 더 어려웠던 시대
김포 장릉은 사실 처음부터 계획했던 여행지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다녀온 융건릉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고, 비슷한 결의 이야기를 품은 장소가 또 없을까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떠올린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사실 김포 장릉은 국가유산 방문 캠페인 여권에 소개된 장소이기도 해서, 스탬프를 모으는 김에 한 번 가보자는 가벼운 계기도 있었습니다. 이 여권과 캠페인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한 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융건릉에서 느꼈던 ‘정치권력 앞에서 희생된 가족의 역사’가 이번에는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약간 흐린 날씨에 강변 올림픽대로를 타고 김포로 향했습니다. 김포 장릉은 도심과 그리 멀지 않지만, 능역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차 소리는 멀어지고, 숲의 기운이 금세 주변을 감쌉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매표소 옆에 작은 전시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는 장릉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조선 왕릉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 왕릉을 관리하던 사람들의 역할까지 간결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능을 걷기 전에 한 번쯤 살펴보기에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정자각을 지나 능침으로 올라가는 길은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조선 왕릉 특유의 질서감이 과하지 않게 이어지고, 걸음을 옮길수록 주변 풍경도 자연스럽게 차분해집니다.
이곳에 묻힌 인물은 조선의 추존 왕 원종과 인헌왕후입니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로, 생전에는 ‘정원군’이라 불렸던 왕자였습니다. 왕이었던 적은 없었고, 그의 아들 인조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뒤에야 비로소 ‘왕’으로 추존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김포 장릉은 단순한 왕릉이라기보다는, 조선이 얼마나 ‘정통성’이라는 문제에 집요했던 나라였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처럼 느껴집니다.
조선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나라는 혈연보다 족보와 종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원종은 세자였던 적도 없었고, 왕으로 즉위한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게다가 생전에는 임진왜란 당시 피난 과정에서의 행적이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비리를 저지른 일들로 결코 흠 없는 인물로 평가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인조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했습니다. 폐모살제라는 중죄를 저지른 광해군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인조의 즉위에는 명분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상, 그 결과가 ‘쿠데타’로만 기억되는 데 대한 부담 또한 컸을 것입니다.
인조로서는 자신의 왕위가 단절된 권력이 아니라, 선조로부터 이어진 정식 왕통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히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곳의 무덤은 처음부터 ‘능’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원(園)의 형태로 조성되었다가, 추존 이후에야 왕릉의 격식을 갖추게 됩니다. 이미 자리가 정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크게 옮기지는 못했고, 기존 터에 석물과 정자각을 보완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능침 앞에 서면 쌍릉 형태로 봉분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좌측이 원종, 우측이 인헌왕후의 봉분입니다. 겉보기에는 다른 조선 왕릉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봉분 아래에는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와 ‘정통성을 위해 아버지를 왕으로 만든 아들’의 복잡한 사연이 함께 묻혀 있습니다.
능역을 걷다 보면 재실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은 과거 능참봉이 머물며 왕릉을 관리하던 공간으로, 지금으로 치면 관리 사무소이자 산릉 제례, 즉 왕릉 제사를 준비하던 장소였습니다. 제관들이 머무르며 제사를 준비하고,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던 이들의 생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능이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살아 있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처럼 느껴졌습니다.
걷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면 여객기가 자주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이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항로의 길목에 있었습니다. 머무르는 동안 몇 차례나 비행기가 뜨고 내렸고, 장릉의 숲과 봉분 위로 겹쳐 보이는 비행기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한 장면 안에서 겹쳐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융건릉이 떠올랐습니다. 융건릉에는 정치권력에 희생된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이 남아 있었다면, 김포 장릉에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끝까지 밀어붙였던 선택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방향은 달랐지만, 두 곳 모두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위와 명분을 얼마나 무겁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습니다.
더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원종 추존을 둘러싸고 신하들과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던 그 시기, 북쪽에서는 후금, 훗날의 청나라가 세력을 키우며 조선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곧 이어질 전란의 조짐이 분명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모든 정통성 논쟁이 과연 조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김포 장릉은 ‘왕이 되는 것보다, 왕으로 인정받는 일이 더 어려웠던 시대’를 조용히 보여주는 장소처럼 느껴졌습니다.
융건릉에 이어 김포 장릉까지, 이곳은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정통성의 현장’을 걷는 시간이었습니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천천히 걷고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기에 이곳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장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