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도 감가상각비가 존재한다.
몇 년 전, 어떤 회사 대표님과 이야기하던 중 아이가 주산을 배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추억의 이름이죠.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취득한 자격증이기도 합니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상공회의소를 들어가 보면 다행히 기록에 아직도 주산 능력 검정 자격증이 남아있습니다. 초등학교, 아니 당시에는 초등학교도 아니던 국민학교 2학년 시절에 땄던 주산 2급 자격증이죠.
그 시절 저는 형, 누나와 함께 당시에는 거의 필수코스에 가깝던 주산-속셈 학원을 다녔습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의 부모님으로서는 3명을 다 학원에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죠. 그래서 형이 중학교를 올라가고 당시의 입시학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주산학원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게 너무 예전 일이라 조금 설명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그때는 고등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가던 시대라 중학교 시절부터 교과목을 보조하는 학원들을 가는 경우가 많았죠.
형은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오랫동안 주산 학원을 다녔는데 저는 초등학교 2학년에서 그만두게 된 것이었습니다. 뭐 그 시절 막내들이 많이 겪던 일이었지만 제 입장에서는 속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학원을 그만두기로 결정이 되고 나서 마지막 국가검정고시를 보게 됩니다. 사실 그때 제 나이가 워낙 어리기도 했고, 심지어는 주산 3급에 합격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부모님은 그거 꼭 봐야 하냐고 물어보셨을 정도였죠. 그리고 저는 어린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학원을 다니려고 끝까지 보겠다고 했고요.
그래도 이미 주산 3급을 딸 실력은 됐기에 조금 더 난이도가 올라갔다고는 해도 주산 2급이 완전히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죠.
그 당시 주산 능력 검정에는 3급부터 '상업 계산'이라는 파트가 붙어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주산 자격증 자체가 '상업고등학교' 학생이나 전공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전표산'이라든가 '상업 계산' 같은 게 붙어있던 거죠. 다른 것들이야 그냥 주판알을 튕겨 계산하면 되는 거였지만 이 상업 계산은 완전히 다른 거였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단어는 '매입제비용'. 이 단어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당연히 어린 마음에 왠지 쿨해 보이는 단어라서 기억에 남은 거죠. 다만 내용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
좀 서론이 길었는데, '매입제비용' 이외에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있었어요. '감가상각비'. 뭔가 이것도 너무 쿨해 보이는 단어였죠. 내용 따위는 상관없고 그저 발음했을 때 멋있으면 그만이었던 8살 짜리였으니까요. 그리고 이 '감가상각'은 그 뒤로 무려 12년이나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경영학과 대학생이 되고 나서 말이죠.
그 어렴풋한 기억 때문이라도 저는 감가상각이라는 단어 자체가 좋았습니다. 물론 뜻 자체는 딱히 좋아해야 할 구석이 없는 단어입니다만. 시간에 따라서 변하는 가치를 계산하여 가치를 산정하는 용어죠.
예를 들어, 중고의 가격을 생각해보면 편합니다. 내가 새 제품을 사더라도 기간이 지나면 점점 그 가치가 떨어지죠. 예를 들어서 회계에서는 컴퓨터 같은 경우도 자산으로 잡히지만 5년을 기점으로 0으로 떨어지도록 잡혀있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5년 된 컴퓨터는 없어진 것이 아니어도 잔존가치가 낮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이런 감가상각이라는 단어가 그 대학교 수업으로부터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더욱 저에게 중요해진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경험의 감가상각'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컴퓨터 감가상각비에 대해서 쓰면서 맞는지 틀린 지 고민해야 하는 제 경험이 감가상각 된 것처럼 말이죠.
'꼰대'에 관련된 글을 올리면서 '꼰대'는 자신의 경험을 갱신하지 않고 논리적 설득이 아닌 경력, 직위, 나이 등으로 강요하는 케이스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이러한 꼰대가 되어버리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경험한 것과 달리 세상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그 변화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죠. 그래서 그들의 경험에 대한 '감가상각'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감가상각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의 '경험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에 경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 적어질 뿐이죠. 5년 지났다고 해서 컴퓨터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도 되고 나름 비싸게 맞춘 컴퓨터는 아직도 현역으로 쓸만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컴퓨터도 i5-4690에 gtx960이라는 무려 2014년도에 나온 조합입니다. 아마도 7년째 쓰고 있는 것 같으니 이 컴퓨터의 평가액은 이미 0이군요.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잘 쓰고 있죠. 심지어 웬만한 게임도 돌아갑니다. 당시에도 최고 사양이 아니었음에도 말이죠.
예시를 다르게 들어보죠. 제가 사회 초년생 당시에 4대 보험 관련 업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땐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카페도 가입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4대 보험 관련 상담도 진행해주면서 나름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게 10년도 넘은 일이죠. 몇 년 지나서 회사를 만들고 직접 고용을 하고 업무를 진행하려는데, 4대 보험과 노무 관련된 부분을 한 때는 달달 외우고 있었지만 기억이 안나는 겁니다. 분명히 그 당시에는 너무 열심히 해서 책을 같이 공저하자는 제안까지 받을 정도로 파고들었었는데 말이죠.
거기다 그 몇 년 사이에 바뀐 점도 너무 많았습니다. 제도, 비율, 이런 것들은 매년 갱신되기 때문에 저의 기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죠. 노무 관련된 지원제도도 다 바뀐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 4대 보험 관련 일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 경험은 이미 감가상각에 의해서 경험으로 내세울 수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물론 그때의 경험이 '업무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름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관계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피해야 한다든지, 이런 직장은 피하라든지, 이런 고객은 진상이라든지... 경험의 의미는 꼭 업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회계에서 감가상각에 의해서 가치를 평가하듯이 우리의 경험도 의미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치가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감가상각을 인정하지 못하면 정말로 '꼰대'가 되어갑니다.
시대의 발달, 그리고 과학의 발달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아동용 과학책에는 아직도 태양계 행성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으로 되어있습니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빠져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말이죠. 지금 이 글을 읽은 분 중에도 '뭐?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책에 적힌 지식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감가상각이 발생하는 것이죠.
'그래 봤자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들이 있는 이상 똑같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사람들은 항상 변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들과 접해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계속 변화합니다. 언어도 계속 의미가 바뀌고, 집은 '사는 곳'의 의미보다 '사고파는 것'의 의미가 강해졌습니다. 전쟁과 배고픔을 겪으며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던 삶은 우울증과 사회적 좌절 등을 겪으며 '죽음을 선택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어딘가 있고, 누군가는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여러분의 이야기인 경우가 드물어졌다는 거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들 조차 미세하게 변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행되고, 감가상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아주 정확하지는 않아도 제가 '경험의 감가상각'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민하게 된 것이죠.
경험의 감가상각은 단지 '꼰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경험의 감가상각에 대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진로교육'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과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는데, 거기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 중 하나가 '경험'입니다. 하던 일을 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죠. 결국 첫 번째 경험이 발생하고 그 경험이 감가상각 되기 전에 계속 이어서 가는 형태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직업이나 진로의 선택은 중요합니다. 바꿀 수 있지만, 바꾸게 된다면 그 경험을 감가상각 되지 않는 다른 형태로 치환해야 하는 겁니다.
어쩌다 보니 너무 멀리 온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매거진 중에서 '교육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열고 거기에서 '경험의 구조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문학과 게이미피케이션을 적절히 조합하면 경험의 구조화를 통해서 경험의 감가상각을 낮추거나 '가치 재창출'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우리는 모든 경험을 다 직접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그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죠. 그건 단지 기능적 경험뿐 아니라 관계, 사고, 소통 등을 전부 아우르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그 경험을 했냐 안했냐가 아니라 얼마나 구조화하여 감가상각비를 떨어트리고 심지어는 재창조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문학적인 영역입니다. 엄청나게 '수고롭고 피곤한' 영역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피곤한 것들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너무 많은 선택의 자유가 고통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어떠한 경험들을 계속 되새기고 그걸 구조화하는 과정을 매 순간마다 반복하면서 산다면 그건 너무도 힘든 일이겠죠. 그리고 그게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걸 많이 하는 사람과 적게 하는 사람 간에 차이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경력에서 시간이 동일하더라도 경험의 소화 정도가 달라서 '믿을 수 없는 경력'이 발생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못하는 경우도 많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으면서 자기가 다 할 줄 안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이없는 건 진짜로 지켜보기만 했는데 스스로 경험을 구조화해서 직접 하던 사람들보다도 더 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건 결국 우리가 관찰하고 인지와 인식을 반복하는 '피곤하고 인간다운' 인문학적인 삶의 태도를 얼마나 유지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왜 모두가 피곤하게 살아야 하냐고요?
모두가 피곤하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잘하고 있다면 그들을 올바르게 '평가'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시간을 일하고 경력을 쌓았더라도 본인이 더 피곤하게 잘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는 사회 말이죠. 사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같은 학위, 같은 경력이 같은 능력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죠. 혹시나 그게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죠.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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