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과 좋은 일

by 게인

아주 따끈따끈한 이야기다. 방금 막 있었던 일이니까.






오래간만에 창립 전부터 함께 해오던 교육단체의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코로나로 이전에는 칸막이를 놓고 말도 몇 마디 못 했지만 거리두기가 없어지고 마스크는 썼지만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반가운 얼굴들도 많았고, 사람 자체를 만나는 일이 줄어들어 입이 심심하던 나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늘 그렇듯 소심한 나는 한참을 떠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혼자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아 그냥 말을 좀 덜 할 걸 그랬나? 이 내용은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이 농담은 좀 아니었을까? 이 타이밍에 끼어들지 않았어야 했나? 너무 말 많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너무 아는 척했을까?'


나는 겉보기에는 활달하고 세 보이지만 사실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갔다 오고 나면 거의 하루 정도는 이렇게 되새김질에 빠져서 끙끙거린다.




한참 끙끙거리면서 걷다가 버스를 탔다. 워낙 요새 운동량이 부족하니 조금 걷고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은 터라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터였다.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밤이 늦은 시간이라 빈자리도 많아서 편하게 앉아서 다시 되새김질을 시작했다.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코드리스 이어폰을 끼고 앉아있었지만 사실 내 귀에는 아무런 음악도 흘러나오고 있지 않았다. 음악은 되새김질에 방해가 된다. 잊어버리고 싶다면 음악을 듣겠지만 오늘 만난 사람들은 내가 오랫동안 봐오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교육을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비록 오랜만에 만나서 약간 의견의 차이가 벌어졌지만.


오늘 모임 장소가 우리 집에서 버스로 4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기에 나는 여유롭게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게) 버스에 타고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흘려보냈다. 이제 내가 내릴 정거장이 멀지 않았을 무렵,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버스 옆자리에 뭔가 낯선 것이 보였다.


그건 에어팟 케이스였다.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니 방금 내 옆쪽에는 덩치가 나보다도 커 보이는 짧은 머리의 검은 옷 남자애와 얇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파란 옷을 입은 남자애 두 명이 탔었다. 고등학생이나 됐으려나... 아마도 그 아이들이 두고 내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 '점유물 이탈 횡령죄'라는 글자가 지나가고 그냥 놔두고 버스종점에 가면 알아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망설이기를 잠깐. 결국에는 나의 오지랖에 손을 들어주고 케이스를 집었다. 열어보니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고 케이스만 달랑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귀에 이어폰이 남아있으니 아마 이 친구들은 금방 자신이 에어팟 케이스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찾아줄 것인가.


예전에 중고 장터를 보면 에어팟 분실한 사람을 찾는 글이 상당히 자주 올라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럼 나도 찍어서 올리고 인상착의를 맞춰서 찾아주면 될 일이다. 두어 개의 정거장이 지나서 내가 내릴 곳에 도착했다. 내려서 집에 걸어가면서 나는 'ㅇㅇ 마켓' 앱을 열었다. 올리려고 하는데 문제는 내가 에어팟이 몇 세대인지 이게 뭔지 모른다는데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인상착의 특정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에어팟 몇 세대인지 검색을 하려는 순간 5분 전 올라온 에어팟 매물이 보였다. 심지어는 에어팟 본체만 파는 매물이었다. 사진을 보니 내가 주운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어? 내가 이걸 매물로 올렸나? 5분 사이에 어떤 사람이 구매 채팅도 이미 날려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이게 에어팟 몇 세대인지는 알게 되었으니 이제 주인을 찾는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쓰려다가 거의 무의식처럼 스크롤을 내렸는데 4분 전에 에어팟 본체를 산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내용을 보니 방금 에어팟 본체를 잃어버려서 산다는 거였다.


뭔가 느낌이 왔다. 그래서 채팅을 걸었다.


'혹시 아까 25번 버스 타셨나요?'


보낸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네네. 맞아요.'

'ㅜㅜ 그 철가루 케이스'

'위에만 씌어져있어요 ㅜㅜ'

'케이스 없고'


안타깝게도 나는 철가루 케이스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복장 말해보세요. 아까 버스에서'


이번엔 5초도 안 걸렸다.


'파란셔츠요'

'옆에 삭발 남자랑'

'습득하셨나요...?'


흠. 아까 그 친구들이 맞았다. 위치를 말해주고 택시 타고 오라고 했다. 집에는 조금 늦게 들어가겠지만 잃어버리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걸 생각하니 그냥 내가 좀 늦게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왕 오지랖을 부렸으면 착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오늘의 모임에 대한 되새김질은 날아갔다. 착한 일이 나의 되새김질을 이긴 것이다.


'그래.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도 있을 테고. 내가 오늘 뭔가 말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좋은 일들이 그걸 상쇄해줄 거야.'


... 그런 거 치고 상당히 늦고 있었다. 걸어오나? 그리고 뒤늦게 옆에 커다란 덩치의 남자애가 생각났다. 혹시 일진이나 양아치라서 나보고 훔쳤다고 이상한 소리 하면 어떻게 하지? 아니 내가 덩치가 아깝지 그런 거에 쫄면 되겠냐? 그래도 애들 가르치던 사람인데 애들한테 그렇게 쫄면 되냐?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 기다리는데, 그래도 안 온다. 아 이거 뭐지... 하고 있던 찰나에 저 앞에 택시가 한대 섰다. 내리는 실루엣을 보니 아까 그 애들이다. 그리고는 내가 있는 곳과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재빨리 폰을 들어 채팅을 보냈다.


'반대방향'


결국 환한 셀프주유소의 조명 아래서 마주쳤다. 나는 에어팟 케이스를 들어 보였다.


파란 옷을 입은 친구뿐 아니라 옆의 친구도 멀리서부터 꾸벅꾸벅 인사하며 다가왔다. 정말 감사하다면서. 역시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진짜다. 파란 옷 친구는 연신 꾸벅거리며 사례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하길래 그냥 됐다고 했다. 간수 잘하라고 하고.


착한 일을 하고 돌아서니 기분이 좋았다. 음.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저 친구들도 천만다행에 마음이라도 마치 뭔가 얻은 것처럼 기쁘겠지? 이제 착한 일을 했으니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라고 생각하면서 뿌듯한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 열쇠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 집에는 아무도 없는데. 이곳저곳 뒤지다 보니 아까 낮에 잠깐 옷을 바꿔 입으면서 빼놨던 게 기억났다. 하... 이걸 어쩐다. 키를 받으러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러 어머니 댁에 갈 수도 없고... 착한 일의 대가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무거워진 몸으로 끙끙거리면서 대문을 넘었다. 옆집에서 도둑으로 착각할까 봐 고민 고민하다가 넘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 몸을 감당을 못해서 우당탕 떨어지며 저절로 아이고 소리가 나왔다.


집에 들어와 보니 대문을 넘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까지고 팔뚝이 긁혔다. 음... 사실 착한 일과 이건 아무련 인과관계가 없다. 있다면 아마 그걸 주인을 안 찾아주고 왔다면 늦은 시간이 아니라서 열쇠를 가지러 갔다 올 수 있었다는 정도? 결국 열쇠를 놔두고 문을 잠그고 나온 건 낮의 멍청한 나 자신일 뿐이었다.


멍청한 짓을 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니 이거라도 좋은 일인 걸로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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