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고능력의 거울일까?
우리는 고의든 아니든 살면서 많은 언어를 배웁니다. 주로 쓰는 언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도 기본적으로 영어 이외에 하나를 더 배우는 시대가 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죠. 물론 시간은 한정적이고 솔직히 우리나라 말 조차도 능숙하게 하기는 참 힘든 일입니다.
외국어를 선천적으로 잘 배우는 분들도 있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처럼 말이죠. 영어든 외국어든 좋아하는 편이었고 성적도 잘 나오는 편이었지만 그것과 잘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일본어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를 처음 외우게 되었던 것이 초등학교 때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오랜 기간 배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저는 일본어를 못합니다.
가끔 방송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나라는 단어와 문법 위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외국어가 어려운 거라고. 실제로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 쓰이는 단어의 숫자는 몇 천 개를 넘지 않는다는 거죠. 일본어 역시 한자가 어렵지만 실제로 그걸 다 몰라도 의사소통은 가능합니다. 일본 내에서도 젊은 층들은 한자 변환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단어책을 12000, 15000 단위로 끼고 공부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공부가 틀렸던 것도 아닙니다.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 그 목적에만 집중한다면 가능하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그 의사소통의 의미가 좀 복잡할 뿐입니다.
예전에는 외국인들이 한국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이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고, 몇 명의 패널이 항상 고정적으로 돌아가며 나왔습니다. 언뜻 생각해도 기억나는 이름들이 있을 겁니다. 뭐 그 중에는 끝이 좋지 않았던 분도 계시지만요.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코로나 직전에 한동안 외국인 패널 붐이 불기도 했고, 이제는 TV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튜브에서는 수많은 한국 거주 외국인들의 채널이나 또는 그들을 게스트로 활용하는 채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한번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 유튜브는 그들의 영상을 계속 우리에게 물어다 줍니다.
그 이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외국인 관련 영상에 쭉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한국어는 어렵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국어는 쉽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떻게 봐서는 당연한 이야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는 '영어는 쉽다'라고 얘기할 테고 누군가는 '영어는 어렵다'라고 이야기할 테죠. 어떤 사람들은 한국에 10년을 살아도 한국어를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미국에 10년을 있어도 영어가 별로 늘지 않습니다.
한국어를 어려워하는 이유들은 헷갈리는 말이 많다는 건데, 그건 대부분 외국어도 마찬가집니다. 대부분의 언어가 같은 단어로 여러 가지 뜻을 사용합니다. 특히 아주 익숙하고 일상적인 단어로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언어 사용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가장 어려워하는 점 중에 하나가 '외국어로 사고할 수 있는가'입니다. 일단 머릿속에서 사고를 하는 언어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면 우리는 한 번의 번역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류가 생길 가능성도 늘고, 버퍼링도 생깁니다. 그래서 정말로 외국어에 익숙해질 때쯤이 되면 외국어로 생각하고 외국어로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미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언어 사용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한 조건 때문에 위에서 나왔던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개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사실 어린 아이다 하더라도 그 나라의 아이라면 의사소통에 능숙하죠. 그 아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나 문법에 모자람이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생각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그 나라를 돌아다니는 데는 그 정도의 언어구사로도 크게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갈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언어의 목적이죠. 우리는 외국어를 무엇을 위해서 배우는 것일까요? 그리고 생활할 만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유독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그 아이가 말을 잘한다고 느끼는 걸까요?
아주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도 겨우 말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귀엽죠. 조금씩 크면서 단어를 하나둘씩 더 말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맞는 단어'만 이야기해도 말을 잘 배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아이가 성장하면서 조금씩 그걸 연결해서 '언어처럼' 쓰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주어니 목적어니 서술어니 하는 것들은 등장할 상황이 아닙니다. 보통은 아이들이 몇 개의 단어로 문장을 구성하는가를 보고 언어의 발달 정도를 파악하죠.
그런데 아이들 중 유독 '언어가 빠르다'거나 '말을 잘한다'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단 아주 어린아이들은 발음이 또박또박 정확한 케이스가 대표적이죠. 대다수의 어린아이들이 정확하지 못한 발음이나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발음이 괜찮아진 나이가 된다면 어떨까요? 그때는 어떤 것을 보고 '말을 잘한다'라고 느낄까요?
보통 그럴 때 판단하게 되는 기준은 '사용하는 단어 수준'에 있습니다. 적재적소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죠. 단순하게 어려운 단어를 쓰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려운 단어를 필요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을 보고 우리는 '말을 잘한다'라는 판단을 합니다. 이때쯤부터 '말을 잘한다'라는 말에 '조리 있게'라는 말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쯤 슬슬 말을 잘하는 것과 '어른스럽다'라는 말이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른스러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아이답지 않음은 뭘까요?
우리가 어떤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들은 것을 이해하고 의미의 전달이 가능한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은 외국이든 우리나라든 아이들만 되더라도 어느 정도 가능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 수준으로만 말할 수 있어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에서 아이들을 판단하듯이, '어른스럽다'라는 기준은 행동에서도 있을 수 있지만 언어 사용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의사소통이 된다고 해서 그들에게 한 명의 성인 취급을 받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죠.
우리 나라말로 아무리 유창하고 성숙한 단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외국어의 표현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는 어린 사람같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언어로 사고를 한 뒤에 번역을 거치는 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는 이상, 외국어를 잘한다고 보기는 어렵죠. 결국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외국어로 사고를 하는 게 필수 조건에 가까운데, 모국어만큼 복잡한 사고를 하려면 그만큼의 단어나 표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외국에서도 언어 사용이나 교육격차에 대한 문제는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이가 성인이거나 일상 대화를 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 그들이 '성숙한 시민'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외국의 영화를 조금만 봐도 어릴 때 운동으로 잘 나가다가 대학교 와서 단어도 잘 못 알아듣는 포지션의 캐릭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뉘앙스는 명백하게 그들을 멍청하다고 조롱하고 있죠.
오래된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유명한 고전 시트콤 '프렌즈'에서도 유사한 설정을 볼 수 있습니다. 맷 르블랑이 맡았던 '조이 트리비아니'라는 역은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자주 단어를 잘못 이해하거나 몰라서 애들 같은 행동을 많이 하는 캐릭터였습니다. 중간에 그걸로 개그를 많이 하죠.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고에 영향을 줍니다. 그게 그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거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더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죠. 다만 일상적인 행동이나 사고에서 우리가 '어리다'라고 느끼는 부분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행동이 오로지 언어만의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적어도 언어, 그리고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부분은 많습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때 외국 가서 할 수 있는 대화의 수준은 아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죠. 아무리 모국어로 성숙하고 어려운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말이죠. 그들에게 느껴지는 수준은 그저 어린아이 같은 수준으로 느껴질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세상은 너무도 쉽게 글로벌화되어서 인터넷을 넘어서 외국인들과 외국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토익이다 뭐다 글로만 영어를 배우던 세대는 이미 많이 지나갔고 외국어 역시 의사소통 능력을 중요시하는 세대로 넘어온지도 좀 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듣고 조금씩이라도 말할 수 있는 세대가 20대와 30대 포지션이 된 것이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어로 스트리밍을 하는 스트리머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외국 스트리머도 한국인들과 소통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홀로라이브 쪽 버튜버 중에는 한국인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사는 캐릭터들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유창한 영어와 일본어를 하지만 한국어도 더듬더듬 이야기할 수 있는 버튜버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더듬더듬 한국어를 하고 있으면 그들의 모국어로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아이 같은 사고와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귀여움이 셀링 포인트인 경우도 많습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누군가는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언어는 상태 표시창과 같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를 얼마나 명확하게 표시해 줄 수 있고, 감정을 얼마나 명확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가는 언어에 달렸습니다. 만일 100의 사고능력을 가진 사람도 10의 언어 전달력을 가지고 있다면 10에서 그 언저리쯤의 사고능력 이상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어렵다는 것이죠. 반대로 20의 사고능력이라면 100의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보통 이렇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만요) 20을 거의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100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10 언저리의 사고능력으로, 그리고 20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그대로 보일 테니 후자가 더 안정적이고 '어른스러운' 사고를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20의 사고능력은 100% 발휘하는 것은 사고능력의 성장을 가져오지만 100의 사고능력을 10~20%밖에 활용하지 못한다면 아마 사고능력의 확장보다 퇴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보통 그렇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위에 말했듯이 언어를 토대로 우리가 '어른스럽다'를 유추하는 건 '사고'와 '언어'가 보통 어느 정도 발맞추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시를 외국어로 들었습니다. 사고 자체는 모국어로 한다면 100을 채우겠지만 언어 표현이 10%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죠. 우리가 되려고 하는 건 외국어를 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길 원하는 것이니까요.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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