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은 게 없으면서도 괜히 서랍을 연다
'냉장고 파먹기'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것을 사지 않고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들을 활용하고 소모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냉장고에 조금씩 쌓아둔 물건이 많아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혼자 살던 시절에 내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는 경우도 많았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를 제외하면. 그걸 알면서도 무언거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유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래놓고 결국 마시는 건 냉수 뿐이지만.
예전에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엄청나게 오래된 재료들이 많이 쌓여있는 경우도 꽤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 냉장고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부모님은 냉장고에 물건을 넣으면, 특히 냉동고에 넣으면 3-4년이 넘게 보관하는 경우도 많았다. 뭐 비단 우리 부모님만의 문제는 아니고, 그 시절을 보냈던 분들이라면 냉동고는 그런 용도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지만.
하지만 그건 냉장고에 한정된 문제고, 나 자신은 다른 곳에는 물건을 꽤 쌓는 편이다. 이전에도 서랍에서 글을 꺼내서 쓰는 것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여전히 나의 작가의 서랍에는 글이 많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라서 발행한 글에 비하면 숫자가 적지만, 발행한 글이 많아지는 만큼 쌓이는 글도 늘어나고 있다.
이번 주는 글쓰기 힘든 한 주였다. 여름휴가를 못 간 대신 우리가 '휴양지'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여기에 있으시다 보니 서울에 사는 누나는 내가 사는 광주에서 휴가의 절반을 보내기로 했다. 조카는 아직 혼자라서 부쩍 우리 아들을 사촌 형아라고 따른다. 거기다 이제는 자기보다 2살 어린 우리 둘째 하고도 붙어서 잘 놀기도 했다. 같이 놀 수 있는 형과 여동생이 있는 우리 집을 오고 싶은 마음이 이해도 간다. 나는 애초에 3남매였기에 그렇게 3명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그렇게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오래된 자동차를 보내주는 일까지 겹치다 보니 정말 시간이 없었다. 거기다 연 이틀 동안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편하지 않은 점심 약속까지 겹쳤다. 결국 이번 주는 오늘까지 하나의 글도 올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번 주에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쓰긴 썼는데 모든 글이 다 서랍 속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전혀 완벽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엉망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완벽한 무언가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날것으로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본인만의 기준점을 만족하는 무엇이 필요하다. 그 관점에서 이번 주에 쓴 글들은 전부 뭔가 하나씩 문제점이 보이는 탓에 하나도 브런치에 올리지 못했다.
이렇게 계속 글이 안 나오면 초조해진다. 그러면 어김없이 또 서랍을 열어보기 시작한다. 새로운 글들이 공급이 안된다면 마치 '냉장고 파먹기'를 하는 것처럼 서랍에서 미완성된 소재나 글들을 가지고 조립을 하는 느낌이다. 어차피 그대로 내놓을만한 비축분은 없다. 각자가 다 나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기에 냉장고에서 말라비틀어져 가는 것처럼 불완전한 채로 서랍 속을 뒹굴고 있다.
그렇게 '서랍 파먹기'를 해서 만족할만한 '무언가'가 나오면 다행인데, 그럴 때마다 더 느껴지는 것은 서랍에 쌓아둔 글들을 파내려가면 파내려 갈수록 글들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딱히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말 '날 것'의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먹음직스러운 형태로 만들어야 할까. 아니면 이 '날 것'의 느낌을 강조해서 신선해 보이게 꾸며야 할까? 사실 후자는 어려운 게, 대부분의 글들은 마치 '제조년월일'이 표기되듯이 내용상에 그 시점의 트렌드나 내용에 연결된 경우가 많다.
기껏 '서랍 파먹기'를 하다가 내린 결론이 서랍 파먹기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글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하다. 하지만 갑자기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의 글은 아마도 곧 올라올 것이다. 어떻게 봤을 때는 그 글을 올리기 전에 무언가 설명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예전에 일시적인 유행이나 콘텐츠 내용에 대한 글을 올리면 '이걸 왜 이제 와서 굳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는 나에게 너무 그렇게 쌓아두지 말고 그냥 올리라는 말도 하는데, 나는 내 '날 글'이 갖는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가장 흔한 이유는 '불특정 다수'에게 풀 수 있는 글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을 너무 강하게 드러내는 글들이 많기에 항상 그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정제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20대의 나는 이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의 글에, 또는 내가 누군가의 글에 열정적으로 달려들어서 다투기에는 내가 너무 '덜 건강한 나이'다.
방금 막 이 글도 서랍 속에 집어넣어 버리려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글을 쓰고 있다. 보통 이런 상황이다. '이 글을 지금 쓰는 게 맞을까? 한동안 글을 올리지 않다가 기껏 올리는 첫 글이 이거라고?' 나도 항상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에 드는 글들만 올리고 싶다. 브런치는 그저 내 넋두리 장소도 아니고 나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적어도 세상에 보이는 창이고, 진지하게 정리해서 올리는 글을 올리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서랍 파먹기'를 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갖춘 모양의 글을 내놓고 싶은 것이다. 내가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왔던 셰프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셰프 같은 마음은 갖고 싶다.
최근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어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사실 위에 놀러 왔다던 내 친누나조차도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브런치 구독자 중 가족이라고는 와이프 한 명뿐이다. 아직 제대로 된 책 한 권 내지 못했기에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해서 내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아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래도 최근에 100개를 넘어가는 글을 달성하고 나서는 마음의 변화가 생겼고, 타인에게 내가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이제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걸까? 마치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왔던 김풍 작가가 처음부터 셰프라고 부르는 느낌이랄까. 어색함이 가시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서랍 파먹기'나 하는 작가지만 작가라고 해도 되는 거겠지? 오늘도 괜히 먹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냉수만 마신다. 그리고 꺼내 쓰고 싶은 글도 없으면서 서랍은 열어보기만 하고 냉수같이 밍밍한 글을 올린다. 그래도 목마를 땐 냉수지. 나만 이런 거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