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바람에 생각나기를

매일 딸아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습니다

by 게인

3살짜리 딸은 이제 곧잘 아빠에게 머리를 맡긴다.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둘째도 처음에는 머리를 말리는 것을 싫어했다. 예전 글에 잠깐 언급했지만 싸우고 다퉈가며 말리다 지쳐서 젤리로 달래 가며 머리를 말렸다. 그래서 둘째는 한동안 머리를 말리면 젤리를 먹는 게 세상의 순리인 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슬슬 익숙해진 탓인지 이제는 아빠가 머리를 말려주겠다 하면 장난은 조금 칠지언정 머리를 아빠에게 맡긴다.


우리 애들은 어찌 된 건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거뭇거뭇하게 길어서 나왔다. 첫째는 태어나자마자 '헤어스타일'이라고 부를 만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둘째도 2살 때 이미 어린이집에서 듬성듬성 머리가 있는 애기들 사이에서 혼자만 까만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일찍부터 머리를 감기고 나면 따로 말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째는 처음부터 많이 아팠다. 병원을 갈 때마다 '원인 불상'이라는 진단명을 가장 많이 받았다. 태어나서 3주 만에 폐렴으로 2주 동안 입원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대부분의 입원 진단명은 '원인 불상의 폐렴'이라든가 '원인 불상의 고열' 등 알 수 없는 원인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던 우리는 발을 동동구를 뿐이었지만 그런다고 뭔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3살이 넘어가고 4살 즈음부터 첫째는 덜 아프기 시작했다.


둘째는 태어났을 때 상당히 건강했다. 그런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뭔가 병이 유행하기만 하면 빼놓지 않고 걸리는 '병원계의 인싸'였다. 농담이 아니라 친화력이 좋고 말도 빠른 탓에 애들이랑 너무 잘 놀아서 그런 것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첫째를 키우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바이러스도 많이 접하게 됐고, 첫째는 걸리지도 않던 수족구를 둘째한테 옮아서 처음으로 걸리기도 했다.


둘째가 감기 비슷한 것만 유행해도 그 유행의 첨단을 걷는 덕분에 우리는 혹시라도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거기다 여자아이라 머리가 길어서 머리를 드라이어로 따로 말리지 않으면 쉽게 마르지도 않았다. 3살도 되기 전에 이미 단발에 가까워진 머리를 말리느라 저녁마다 진땀을 빼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나마 이제는 첫째도 둘째도 그럭저럭 머리를 잘 말린다. 아이의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게 되면 나는 '아버지는 딸 머리를 몇 번이나 말려봤어요?'하고 놀린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손녀딸 머리를 말리는 것을 지켜보신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는 건 목욕탕을 갔을 때나 있던 일이었다. 머리를 자주 안 감는 집도 많아서 '참빗'으로 '이'라고 불리는 벌레를 잡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고, 학교에서 그에 관한 통지문이 나오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우리도 아주 어릴 때는 그렇게 이를 잡아야 하는 아이 중 하나였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탓도 있었고, 당시 우리가 살던 '농장'은 산속에 있었다. 물이 끊기는 것도 꽤나 있는 일이라서 항상 마당에 커다란 통에다가 물을 받아놓고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을 바가지로 퍼서 세수를 하거나 이를 닦았다. 그러다 보니 겨울이 되면 얼음을 깨고 그 물로 씻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핑계 같지만 그래서 더욱 깨끗이 씻고 다닌다는 건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 당시에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환경이 좋지 못한 아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누군가 힘들게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 거기서도 가끔 부모님을 떠올린다. 아프거나 힘들거나, 이런 좋지 못한 기억들에서만 부모님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데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일이다.




사람은 기억의 동물이다. 인상 깊은 일들에 대해서 연관 지어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내가 부모님과의 사이가 딱히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와 연관 지어서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다. 거기다 그런 기억들의 대부분은 부모님이 아프신 것이나, 아니면 내가 아팠던 기억에 대한 것들 뿐이다. 막내였지만 4살 때 떡을 먹고 급체한 이후로 나는 계속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10년 가까이 한의원을 다녀야 했고, 열만 올랐다 하면 무조건 고열에 시달렸다.


농사일을 짓던 부모님이 나한테 신경을 집중할 하시는 건 그럴 때 이외에는 별로 없었다. 과수원 일들은 언제나 바빴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생 1학년인가 2학년이던 시절에 데려다 줄 사람이 없어서 40분 정도 시외버스를 타고 혼자서 제주시로 병원을 한 달 동안 다녔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내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고, 양쪽 집안의 장남과 장녀였던 부모님은 모든 친척들의 일에도 신경을 쓰셔야 했다.


그래서 20살이 되고 부모님을 떠나온 이래로 부모님과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크게 부모님을 그리워할 부분은 없었다. 20살이 된 나는 생각보다 튼튼했고, 아프지 않으니 부모님을 떠올리는 건 오히려 아픈 분들을 마주쳤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머리를 말려주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몇 년 동안 계속 이렇게 우리 딸의 머리를 말려준다면 나중에 딸이 커서 머리를 말릴 때마다 아빠가 생각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어머니는 어릴 때 우리 세 남매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신다. 지금 내가 아이들과 까르르 거리며 몸으로 놀고 있는 걸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내가 3살 때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도 어렴풋하게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손에 많이 자랐다.


나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할머니'를 매일 부르는 것만 봐도 뭔가 기분이 묘하다.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아마 너무 행복한 기억일 거다. 맛있는 음식이나 생선 같은 것을 보면 아이들은 할머니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머니가 평생 우리 세 남매랑 놀아주신 것보다 얘들 둘이랑 더 많이 놀아주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는 그땐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며 나 보고는 꼭 애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라는 이야기를 하신다.


하지만 나 역시 그때의 부모님처럼 2명의 아이들을 보면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쓰는 일이다.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나를 머리 아프게 한다. 하루 24시간은 너무도 짧다. 그래서 아이들이 잠들면 몰래 일어나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만일 첫사랑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게 첫사랑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접할 때마다 첫사랑의 기억은 다시 생각날 수밖에 없다. 다만 더 큰 사랑으로 인해서 그 기억이 흐려질 순 있다. '사랑'이라는 색인으로 기억을 꺼내서 읽었을 때, 첫사랑보다 더 많은 다른 설명들이 쓰여 있다면 거기까지 읽어 내려가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지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두고두고 꺼내서 읽게 되는 것은 기억이다. 나는 내 아이들의 기억의 사전 곳곳에 나를 남기고 싶다. 약방의 감초처럼 색인에서 어떤 항목을 찾아서 열더라도 '아빠가 이랬지'라는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아이들은 매일 확인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아이들에게 그런 존재로 잊히기보다는 남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떠올릴 때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머리를 말릴 때만이라도 아빠를 떠올리며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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