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스타일로
어렸을 때 아주 유명했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였습니다. 한석규의 명품 연기와 더불어서 김현철이 부르던 '달의 몰락' 주제가는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솔직히 너무 오래된 드라마라서 내용이 완전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만 한석규의 역할이 '제비'였다는 것만은 기억납니다. 그리고 제비였기에 '허세'를 부리는 인물로 나왔다는 것도.
드라마의 이야기지만 세상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는 캐릭터에 대해서 손가락질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는 적어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허세를 부리는 게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사람을 판단하면서 옷차림과 행색을 봤던 이유는 그저 선입견만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본인의 수준에 맞는 소비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이 많으면 돈을 썼고, 돈이 없으면 없는 만큼 행색이 초라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에 맞지 않게 무리하는 사람들의 끝은 '야반도주'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지역 커뮤니티가 활발하던 시대라 '누구 집 아들이 도망갔다더라' '누구 집이 망했다더라' 이런 건 순식간에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특히 뭔가 치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결국 타인에게 사기를 치는 경우가 워낙 비일비재했던 탓에 그걸 경계했습니다. 드라마 속 한석규의 역할처럼 제비나 사기꾼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벌이에 비해서 꾸미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사치라는 건.
사치를 영어로 했을 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 세대한테 물어보면 '플렉스'라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제가 대학시절에 문화사회학에서 소비문화에 대해서 배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사치와 허영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대학생 정도의 지성이면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참 허세를 부리고 싶은 대학생들이기에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을 위한 소비 정도는 변명했지만 그것도 '취미'에 가까운 영역에 대한 변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시절 '된장녀'라는 단어가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스타벅스가 유행하던 시점에 '테이크 아웃 커피'의 붐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수업 중간에 건물 입구에서 뽑아먹던 캔음료도 비싸서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던 세대에게 테이크아웃 커피는 '미친 짓'에 가까웠습니다. 그 당시의 커피숍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커피 전문점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그 때는 말 그대로 '자릿값'이 절반이었습니다. 커피 자체가 맛있어서라기보다 데이트나 소개팅, 그도 아니면 나름 격식을 갖춰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 가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자리에 앉지도 않고 컵에 담아서 들고 오는 커피의 가격이 몇천 원이라고? 대학가에서 2000~3000원 사이의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어이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허세로 마시는 소비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이 뒤따랐습니다. 지금이야 SNS 감성샷이라도 찍는다지만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싸이월드 미니홈피 같은 SNS 종류가 있긴 했지만 그 SNS는 지금처럼 '감성샷'이 지배하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스마트폰 시대가 아니었기에 '테이크 아웃 커피'는 사진 찍는 용도로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의외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갑자기 문제가 되었던 점은 보통 그런 소비의 주체가 '여성'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교묘하게 성 대결로 끌고 갔고 사람들은 본질을 놓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본인이 좋다면 밥을 굶고 커피를 마시든 어쩌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그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허세'와 '과시적 소비'의 차이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래도 커피 정도면 밥을 굶으면 마실 수 있으니까 그 정도의 허세는 본인이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영향을 너무도 잘 받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교복을 입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아직도 대부분의 학교는 교복을 입습니다. 누군가는 교복이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그 자율성을 각급 학교에 맡긴 결과, 대부분의 학교는 다시 교복을 택했습니다. 심지어 교복 자율화를 했다가 학부모들이 항의하여 다시 교복으로 돌아간 학교도 있었습니다.
사실 교복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 1년 동안 매일 입어도 되는 튼튼한 옷이라면 그 정도 가격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부분은 하복, 동복이 있다 하더라도 한 두벌 가지고 1-2년 이상 입었으니까요. 중간에 엄청 자라서 치수가 맞지 않는 한은. 사복을 계속 입으려면 아이들에게 엄청난 옷값이 들어가고 심지어는 서로 비교가 되는 부분이 너무 커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옛날 중고등학생들은 유일하게 '사제'가 허용되는 신발에 돈을 썼습니다. 나이키니 푸마니 리복이니 그런 메이커들에 민감했던 세대가 있었죠.
그 당시에도 부럽긴 했지만 누구나 그런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너무 튀게 그런 사치성 행동을 하면 불러다가 주의를 주기도 했습니다. 경제력의 차이가 아이들에게 박탈감으로 지나치게 작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지금이랑은 다르게.
위의 테이크아웃 커피 논란 즈음으로부터 사람들은 '사치'와 '소비'에 대해서 이전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학교에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등골 브레이커'였습니다. 부모의 등골을 빼먹다 못해서 부숴버린다는 뜻을 비꼬아서 쓰는 단어였죠. 모두들 대충 알고는 있겠지만 이 '등골 브레이커'의 대표 격이었던 것이 '아웃도어 브랜드'의 '패딩'이었습니다. 이게 워낙 열풍이라서 가장 잘 팔리던 브랜드에서는 우리나라의 국토가 70%라서 산악용품이 잘 팔리는 것이라는 웃지 못할 분석을 내놓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 아니죠. 그저 허세였을 뿐입니다.
지금은 타인의 소비를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누구나 쉽게 이야기를 못할 뿐이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허세입니다. 사실 저렴한 패딩도 많았고, 패딩을 안 입어도 얼어 죽을 만큼 한국이 추운 곳도 아니니까요. 패딩 이전에도 일명 떡볶이 코트가 유행했던 적도 있고, 코트나 위에 입는 다른 점퍼류를 안 입었던 것이 아닌데도 '남들 다 입는 패딩'이라서 입어야 한다는 거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냥 시대적으로 '소비의 허세'에 면죄부가 생긴 것뿐이었습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런 유리창도 깨지지 않은 건물은 타인이 쉽게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깨진 유리창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뒤로 그 건물은 엉망진창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번 뚫린 허점은 놓치지 않습니다. 커피 논란을 시발점으로 해서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가 돈이 되고, 그걸 문화로 포장해서 부추기는 것이 자본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커피는 사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허세였습니다. 물론 그것도 모으면 큰돈이긴 하지만 밥이라도 굶으면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점점 허세의 크기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SNS에서 갖가지 명품을 자랑하는 것도 모자라서 특정 유행하는, 아니 누군가가 억지로 유행시키는 브랜드를 모르면 센스가 없는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거 입는다고 해서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이 되는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냥 유행을 따라가는 것뿐일 텐데요.
그렇게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의 허용에서 '허세'의 허용으로 선이 넘기 시작했습니다. '푸어'의 시작이었습니다. 적어도 최초에 논란이었던 커피는 푸어는 없었습니다. 커피 좀 마신다고 빚을 내서 가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세의 선이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푸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우스 푸어'는 그래도 의식주에 해당하니 단순하게 허세에 해당하지는 않았는데, '카푸어'부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월세를 살든 원룸을 살든 그들에게는 비싼 차를 '빚'으로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소비 같은 것은 20-30대가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20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보기 힘들던 비싼 차들이 이제는 길거리에 나가보면 거의 반반입니다. 그리고 그걸 몰고 다니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차를 끌고 다니는 MZ세대 입니다. 그만큼 잘 버는 세대가 되어서 그만큼 소비를 하고 있는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보통 그렇지 않습니다. '신용사회'의 단점일 뿐입니다.
애초에 소비가 아니다 하더라도 예전부터 '상류층'에 대해 따라가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제사 문화'입니다. 실제 서민들에게 제사문화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있는 집에서 하는 것들이었기에 그것이 전통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그런데 조선 말기부터 양반이 급증하면서 양반이라는 티를 내기 위해서 누구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없는 집들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음악이나 다른 문화의 경우에는 오히려 더 편했습니다. 클래식이나 국악과 같은 상류층의 취미를 서민들이 즐기는 데는 엄청난 돈까지는 필요 없었습니다. 오디오나 축음기가 비싸긴 했지만 그걸로 대중음악을 듣든 클래식을 듣든 그 정도 차이였을 뿐이니까요. 그렇게 구별이 어려워지니 상류층은 비싸디 비싼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것으로 다시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사람들이 상류층의 문화를 향유하여 상류층에 도달하려는 욕구는 어떤 면에서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지적했던 것처럼, 그것이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과시적 소비와 허세는 엄연히 다릅니다. 적어도 과시적 소비는 그 소비를 감당할 만큼의 재력이 뒷받침되는 것이라서 '졸부'라는 소리는 듣는 것에 그칩니다. 그런데 허세는 다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허세는 결국 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걸 감당하기 어렵기에 항상 범죄와 연결고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사기꾼'취급을 받았습니다.
직업과 커리어를 구분하는 법에 대해서 누군가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돈을 받아야만 할만한 일이 직업이고, 돈을 안 받아도 하고 싶은 일이 커리어라고. 허세와 소비의 구분도 비슷합니다.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허세고 아무도 몰라도 하게 될 것이 소비입니다. 약간의 과시가 섞인 소비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소비의 본질은 관심보다 필요성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