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모두가 가난하거나
일본에서 방영했던 '본비 걸'이라는 방송이 있었다. '비본'이 일본어로 가난이라는 말인데 그 단어를 그대로 쓰지 않고 뒤집어서 가타카나로 외래어처럼 썼다. 더 캐주얼하고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20대 여성들을 밀착 취재하는 '예능' 방송이었는데 일본에서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폐지되긴 했지만.
한국도 사실 이제 '가난'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이라든지 뭔가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더 많이 쓰고, '가난'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단어 자체가 갖는 느낌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어가 없어졌다고 해서 '가난'이 없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더 이상 쓰이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 가난조차도 가치 판단의 일종이 되었다. 가난의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다 보니 본인의 씀씀이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표현을 쓴다. '등골 브레이커'들은 몇십만 원짜리 패딩이 없다고 자기가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상대적 빈곤'이라는 것이다.
한때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이 한참 잘 나가던 시절에 모 밴드가 인기를 타고 출연한 적이 있었다. 꽤나 반응이 좋았던 노래에 타이밍 좋게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하면서 급격하게 인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지만 거기 나왔던 그들의 삶의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다. 엄청 고생하면서 가난하게 산 것처럼 이야기했던 멤버가 실제로는 부모의 기업에 임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던 것을 포함하여 그들의 생활이 작위적이라는 논란이 터진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무소유를 이야기하면서 유명세를 누렸던 어떤 방송인은 본인 소유의 집과 회사 등 엄청난 재산을 방송에 나와서 공개하여 비난에 직면했다. 결국 '풀 소유'라는 비꼰 별명까지 얻으며 잠적했다. 어디서 쿨타임을 돌리고 있겠지만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무소유를 이야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누군가에게 많은 돈은 누군가에게 적은 돈일 수도 있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생존이 목적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기초수급을 받지 못해 유명을 달리한 가족에 대해서 동정은 하지만 사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의외로 집이나 재산이 상당히 있는 상태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준은 사람마다 상대적이니까.
상대성을 인정하라는 것을 진보의 가치로 내세우면 모순이 발생한다. 아무리 부자여도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세금이 갖는 사회의 '분배' 기능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또는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국가의 행위를 '폭력'으로 느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피해를 당하는 본인이 상대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에 달려있다는 기준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래서 상대성만 주장하다가는 자가당착에 걸린다. 지속적으로 사회에서 보수적 성향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가정에서 기업처럼 재무제표를 쓴다면 가난한 사람은 훨씬 늘어날 것이다. '가계부채'라는 것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빚'을 지는 것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신용카드를 쓰는 것조차 빚이라고 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몇 년 전까지도 거의 체크카드 위주로 생활했다. 하지만 달콤해 보이는 대부분의 혜택은 카드에 있다. 사실상 빚을 내면서 살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집을 빚을 내서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누구나 대출을 받아서 전세든 구매든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월세나 더 작은 집 전세부터 차근차근 돈을 모아서 구매하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자동차조차도 할부나 대출로 사는 경우가 많다. 일단 지르고 갚아나간다.
어떻게 봤을 때는 시작점은 '할부'일 수도 있다. 카드 사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할부를 하기 시작했다. 당장에 나가는 돈은 많지 않기 때문에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고 지금을 즐긴다. 하지만 할부도 결국 빚이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결국 구독 경제와 할부 등에 의해서 흔히 말하는 '월급이 통장에 스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결국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돈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뭔가 큰 이익이 날만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식, 부동산, 코인 같은 것에 손을 댄다. 그리고 그러한 강렬한 경험은 도박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쉽게 큰돈을 만졌다는 것이 도파민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끝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사실상 대출, 할부, 이런 것들은 '빚'이다. 그걸 빚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라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운 걸까. 마치 투기를 투자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예전에는 투기라고 불렸던 것들이 지금은 죄다 투자라고 부른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 중계하는 수수료가 돈을 벌게 되는 구조를 우리는 보통 도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같은 구조를 가지고 지금은 '투자'라고 부른다. '영끌'이니 '파이어족'이니 명칭을 새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개념의 부정적 이미지들을 피해 간다.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빚'도 점점 이야기하지 않는다. '빚'과 '가난'이 없는 세상이라니. 그건 유토피아에 가깝다. '투기'도 없고 전부 '투자'다. 가치 판단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뭐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전부다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얌전을 빼며 앉아있다. '빚'을 내서 '투기'를 한 사람은 없다. '대출'을 끌어모아서 '투자'를 한 사람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모두 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낀다면 가난이라는 개념은 필요 없다. 상대적으로 모두 다 불행하다면 불행을 이야기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가치의 개념을 흔든다. 절대적인 가치의 개념을 기준에 두지 않으면 상대적으로는 뭐든 말이 된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절대성이라는 담보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논리에 '궤변'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리고 '신 존재 증명'이나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즘'이 나와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