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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Nov 29. 2022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순간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걸쳐 알고 지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스치듯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 모든 사람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이유가 있다면 기억하기도 한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라던데...'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뜻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우리가 교육에 힘써야 하는 이유도 그나마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에게 어떤 성향이나 가치관이 자리 잡은 이후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가치관이나 성향이 언제 자리 잡는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다. 부모의 손이 덜 간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 성향을 가지고 행동을 한다는 의미다. 요즘 아이들이 언제 부모의 손을 벗어나서 행동하게 되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아주 이른 시간에 '성향'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도 성향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테고, 그 성향이라는 것 중에 하나는 낯을 가린다는 거였다. 중고등학생의 대부분이 겪는 상황이지만 새로운 학교로 진학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친해지고 누군가와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가면 쉽게 친해지는 편이었지만 그게 깊게 친해졌는지 아닌지를 알 방법이 없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낯설어지면 처음부터 그런 거였는지 아니면 중간에 문제가 생겼는지 고민해야 했다. 




 보통은 그렇다. 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데는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긴 시간이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그 조금으로 인해서 매년 나오는 와인맛이 달라지고 어떤 해에는 최고의 와인이 탄생하기도 한다. 사람을 바꾸는 건 오랜 시간의 영향도 있지만 의외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이든 동아리든 알게 되는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남자반 여자반이 갈라져있는 무늬만 남녀공학이었던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알게 되는 일은 드물었다. 동아리 친구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접점이 없었다. 특히 먼 곳에서 남자중학교를 나온 입장이다 보니 더 그랬다. 그 외에 내가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되는 여자아이들은 특출 나게 뭔가를 잘하거나 아니면 친구들이 좋다고 쫓아다니는 경우였다. 


 그 친구는 후자였다. 누구였는지 기억은 안나는 남자애가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우리는 열심히 놀렸다. 유치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얼굴과 이름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지금까지 얼굴도 이름도 기억에 남아있다.




 정말 별 일 아니었다. 


 나와 친했던 친구가 학생부회장에 출마했고, 선거 참관인을 나에게 부탁했다. 귀찮은 일을 잘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눈곱만큼이라도 '모범생'의 이미지가 남아있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거 참관인이라는 건 투표소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정행위를 하는지 그저 관찰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뭐 대단한 고등학교도 아니었고 학생회가 된다고 해서 권력을 지니는 학교도 아니었던 탓에 부정행위 같은 게 발생할 기미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선거는 몇 시간에 걸쳐서 진행됐다. 전교생이 1200명 정도였으니 정말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내 옆에는 상대 후보에서 추천한 선거 참관인이 앉아있었다. 처음에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목례만 하고 앉았지만 나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위에 나온 '그 친구'였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낯을 가렸고, 특히 여자애들에 대해서는 거의 면역력이 없어서 쳐다보는 것도 어색했다. 


 몇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여자랑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놀리는 친구들이 투표하고 지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 난 후였다. 갑자기 옆에 있는 '그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말을 걸었는데 무시할 수도 없어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심지어는 대화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그 친구가 웃으면서 '그래도 이쪽 좀 보면서 얘기를 해'라고 했던 부분이다. 


 뭐 죄지은 건 아니었으니 보긴 봤는데, 그때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 애를 알고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이야기를 해 본 순간 충격을 받았다. 웃으면서 누군가가 나의 눈을 그렇게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게 처음이었으니까. 너무 당황해서 고개를 다시 돌리니까 '왜 수줍어하는 것처럼 그러냐'라고 해서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친구는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대화 내용은 잡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게 그 친구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었다. 내가 극적으로 그 친구에게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었고 단지 그때 몇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그 친구와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 충격은 나에게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살아오면서 그렇게 타인의 눈을 들여다보고 산 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누가 나의 눈을 그렇게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 '눈 맞춤'이라는 것이 주는 느낌은 예상대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그게 갖는 의미를 그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덕분에 오해를 산 적도 많이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때의 나와 같았다. 눈을 맞추면 피하거나 당황하거나 오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웃으면서 눈을 맞추는 것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대학시절의 나는 그렇게 '초 인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집돌이'생활을 더 즐기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슬픈 것은 나이 먹고 만난 사람들은 갈수록 '눈 맞춤'을 좋아하지 않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걸 시건방지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꽤나 늘었다. 대부분은 '아는 사람인가?' 하는 흔들리는 눈빛을 보여주거나 누군가는 사람 꼬실 거 아니면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내 아이들과 아내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눈을 들여다볼 일이 많지 않다.


 누군가는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타인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가 많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든 좋지 않은 감정이든. 어떻게 봤을 때, 아마 그 친구와 그 짧은 순간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은 많이 달랐을 거다. 진지하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늘어놓는 내가 '인싸'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단 한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는 일. 그게 긍정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늘 글을 쓰면서 떠올렸던 그 친구의 얼굴과 그 감정을 되새기면서 다시 만날 사람들에게 눈 맞춤을 선사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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