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은 태양계가 아닌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술을 한잔 했다.
나와 꽤 오래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보면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일'로 만났다가 '지인'으로 오래 연이 닿은 사람들은 더욱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대단히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고 '나쁜 사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렇다. 다들 나름대로 자신의 주관이 있어서 본인이 납득하기 전에는 엉덩이가 무겁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귀가 얇다는 점까지.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열심히 잘하고 활동도 잘해놓고 나서는 어느 순간 자기 혼자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니 타인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니 올라가는 속도는 빠르지만, 약삭빠르거나 잇속을 챙기는 것이 약하고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손절을 잘하는 타입들도 아니라서 더욱 그렇다.
"명왕성 같네요."
문득 내가 그렇게 말했고, 지인분은 딱 맞는 표현이라며 웃으셨다.
얼마 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책을 받아왔다. 명왕성에 관한 책이었다. 책은 명왕성이 오랜 친구들인 태양계 행성들로부터 행성 가족이 아니게 되어서 자신이 소속될 곳을 찾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사실 이미 아이가 어릴 때 나는 오래된 과학책을 읽어주다가 '명왕성'이 태양계 행성으로 표시된 것을 보고 명왕성의 퇴출(?) 건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 적이 있다.
"그럼 명왕성은 어떻게 됐어요?"
아이의 질문에 나는 "그냥 태양계 행성이 아니게 된 거지 뭘."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명왕성'이 더 이상 태양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진짜?"라면서 되물을지도 모른다. 명왕성은 공식적으로 태양계의 행성이 아니다. 어린 시절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외웠던 입장에서는 마지막까지 다 부르지 못하면 뭔가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다.
태양계 행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미달되었기 때문이다. 태양계 행성이 되기 위해서는 태양 주위의 공전 궤도를 돌아야 하고, 자신의 중력에 의해서 구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전 궤도 안에 들어오는 다른 천체에 대해서 끌어들이거나 튕겨낼 정도의 중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견 당시에는 지구의 17배쯤으로 추정되었던 명왕성은 정밀한 측정에 의해서 지구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태양계 최외곽에는 그런 명왕성과 비슷한 크기의 별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일명 '카이퍼 벨트'라고 부르는 그런 작은 행성들 모두를 태양계로 편입시킬 순 없었다. 결국 천문학자들은 명왕성의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한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던 태양계 행성은 9개였지만 8개로 줄어버렸다.
행성이 아니라고 부정당한 명왕성은 2006년에야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왜행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위에 언급한 3가지 조건 중 공전궤도만을 돌고 있는 구형이 아닌 천체는 소행성으로, 그리고 공전을 돌고 구형에 가까운 중력에 의한 모양까지는 구성했지만 공전궤도의 다른 천체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소규모 행성들을 모아서 '왜행성'으로 분류했다. 아마 명왕성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규정일지도 모른다.
태양계 행성 중의 하나로, 심지어는 미지의 개념이었던 '행성 X'로도 의심받았던 명왕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사람들의 착각에 의해서 태양계의 행성으로 추대받았다가 박탈당하고 다시 왜행성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기까지 했다. 그동안에도 그저 명왕성은 그 자리에서 묵묵하게 공전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말로는 욕심이 있다고들 하지만 막상 욕심이 크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이 욕심을 부려서 자기 몫을 챙기고 차고 나갔다면 흔히 말하는 '중앙정치'에서도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좋은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추진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타인에게 이용당하기도 하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휘둘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잊지는 않는다. 그들이 환멸을 느끼고 활동을 안 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대신 안타까워한다. 여전히 그들과 같이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하기도 한다.
명왕성은 하나다. 사실 '왜행성들'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명왕성들이라고 썼다. 왜행성이 여러 개 있더라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은 명왕성에게만 존재한다. 1930년에 발견돼서 76년을 태양계의 행성으로 살았던 명왕성을 단순하게 왜행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은 사실 공전궤도를 돌고 있다. 우리는 그저 지구 위에 살고 있지만 공전 궤도를 돌고 있다. 인지하면서 돌지 않을 뿐. 이륙 후의 비행기에서 그다지 속도가 느껴지지 않듯이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는 지구에서 멀미하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사람이 커 보이고 작아 보이는 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나와 공전궤도에서 멀어지면 작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가까워지면 크게 착각할 수도 있다.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언제나 그렇게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을 행성으로 불렀다가 왜행성으로 보냈다가 한다. 그렇게 명왕성들이 오늘도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