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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Dec 21. 2022

상상도 못 했던 타이틀을 달았다

저는 이제 "쓸개 빠진 놈"입니다.

 한 달여 쯤 전에 응급실이라는 글을 올렸다. 나중에 안 거지만 그건 전조증상 같은 거였다. 그보다 더 약한 전조증상은 그 전에도 나에게 계속 신호를 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 전조증상에 엉뚱한 해답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일이 터졌다. 












 한 달 전에 처음으로 '급성위경련'이라는 병명을 받아 들고 응급실을 처음으로 이용해 본 나에게 비슷한 증상이 계속 조금씩 발생하고 있었다. 대책 마련이 시급해서 위경련과 관련한 약과 찜질팩 등을 구비했다. 먹는 거는 사실 술도 자주 먹는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책 없이 짜게만 먹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식도 잦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조금씩 느낌이 오던 녀석은 갑자기 나를 덮쳤다. 결국 나는 쥐어짜고 찌르는 뱃속을 참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다 다시 응급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서는 한 달 전 기록이 있어서 들어가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아. 이제야 안정을 찾을 수 있겠구나. 거의 길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참고 있던 나에게는 그 희망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때와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 이번엔 진경제에 진통제가 다 들어가도 통증에 도통 반응이 없었다.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원래 진통제가 들으려면 2-30분 정도 있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효과가 느리면 먹는 진통제랑 차이가 뭐란 말인가. 그래도 뭐라 할 말은 없어서 계속 뒤척거리며 신음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10년 같은 10분이 지나고, 의사가 다시 와서 체크를 했다. 나는 탐관오리를 암행어사에게 고해바치는 민초의 심정으로 냉큼 통증이 전혀 줄지 않았노라고 고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상하다는 듯이 갸웃거리며 진통제를 하나 더 놔드리겠다고 하고 가셨다. 그리고 진통제를 하나를 더 맞고 나니 통증이 조금 '나아졌다'. 사실 통증이 온 후에 몇 번이나 기절하듯이 자고 싶었지만 아파서 잠도 못 잤었다. 그나마 통증이 줄어들어 잠시라도 수면 상태에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진통제와 수액을 다 맞고 나니 고통이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받아 들고 나왔다. 일전에 이어서 두 번째 방문이라는 말에 의사는 이번에는 한번 '소화기내과'를 내원하시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일단 약을 먹고 몸이 나으면 위내시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위가 어딘가 고장이 났다고 판단이었다. 위경련이 너무 자주 오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집으로 가서 내키지 않는 뭔가를 조금이라도 주워 먹고 약을 먹은 뒤 잠을 청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통증이 '나아진 것'이지 없어진 게 아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통증도 견디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약을 챙겨먹었 건만 이상하게 통증이 줄어들지 않았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계속 버둥거리고 있으니 가족들이 더 문제였다. 응급실은 이미 다녀온 상황에 약도 있으니 응급실 가라는 소리는 못하고 다들 어쩌냐고 걱정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인 토요일 오전에 일찍 '위 내시경'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동네에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도 내시경진료를 볼 수 있는 병원이 있었다. 물론 그걸 위해서 그 전날 저녁부터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 어차피 뭐가 뱃속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지만.


 아침 일찍 갔지만 나보다도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 끙끙대며 기다리다가 순서를 받고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상황을 설명하자 의사 선생님이 그럼 '복부초음파 검사'를 먼저 해보는 게 어떻냐고 하셨다. 증상이 무엇과 비슷하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이 귀에 잘 들리지도 않고 그저 뭐든 좋으니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심지어 이 통증만 지금 멎으면 될 것 같은데 이거에 듣는 진통제는 없냐는 소리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초음파를 보시는 의사 선생님이 당황하셨다.


 "어?"

 "네? 왜요?"

 "담낭염이네요. 담석이 아주 큰 놈이 있어."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초음파 화면에는 검은 장기가 하나 보였고, 그 아래로 하얗게 뭔가 끝부분에 보였다. 의사 선생님이 이게 쓸개고 그 끝을 담석이 막고 있어서 벽이 부은 거라고 하셨다. 문제의 원인을 알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갑자기 뭔가 덜 아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초음파를 끝내고 심전도 검사를 하고 위 내시경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나를 진료했던 원장선생님이 위내시경을 캔슬하고 바로 CT를 찍자고 하셨다. 뭐 일단은 아까 담석이 있다고 하셨으니 그게 맞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가 난생처음 CT도 찍었다. 


초음파는 아이를 확인할 때만 쓰는 게 아니었다...


 웃음이라도 나왔던 건 그때부터였다. 뭔가 희망이 보였다고 할까. 그전까지는 희망은 보이지 않고 고통만이 영원이 떠나지 않을 것처럼 맴돌고 있어서 정말 괴로웠다. 결국 CT 결과를 기다리며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급성담낭염'소견이었다. CT와 초음파에 나온 담낭 벽이 이미 부어오른 정도로 봤을 때 담낭이 제 기능을 다해서 떼어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와 쓸개의 이별은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는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일단 떼고 큰 문제가 없는 거면 이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고 싶었다. 여전히 나는 아팠으니까. 다만 원장님이 난색을 표한 건 토요일 오전이었다는 점이었다. 주말이라 응급수술이지만 바로 받아주는 곳이 없을 거라는 것. 정 안되면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야 하지만 거기도 응급수술을 해준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다. 사실 나도 응급실을 갔다가 온 상황이었기에 그 말이 더 신뢰가 갔다. 그러다 자기가 봤을 때 가장 이런 수술을 잘하는 병원에 일단 전화를 해줄 테니 외래로 가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셨다.




 병원을 나오니 눈이 미친 듯이 내리고 있었다. 진료를 받은 병원과 받아야 할 병원의 거리는 정류장으로 1블록 반이었다. 그 애매한 거리를 눈이 오는데 버스까지 기다리고 싶지는 않아서 걷기로 했다. 잠시 걸었는데 눈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눈을 헤치고 병원에 가서 외래를 기다렸다. 친절해 보이는 선생님이 상담을 해주시면서 자기가 봤을 때도 급성이고 아파하는 정도로 봤을 때 염증도 많이 있어서 바로 수술해야 하는데 자긴 오후에 수술이 있고 지금 다른 선생님은 수술 중이라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거기다 자신은 곧 출장이 잡혀있어서 다른 선생님께 의논을 좀 드려야겠다고 하셨다.


그날 정말 눈이 미친 듯이 내렸다. 병원에서 수술 전날 밤에 테라스에서 찍은 설경. 엄청 큰 도로다 저거...


 그래서 일단 병원에 입원을 하고 기다렸다. 여전히 내 쓸개는 저절로 몸이 구부러질 통증을 주고 있었고 나는 끙끙거리며 이 고통만 어떻게 지나가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친절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내 상황을 묻더니 오늘은 너무 늦었고 일요일이지만 내일 아침에 수술하는 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는 무조건 좋다고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만 하면 된다고. 선생님은 그럼 준비 잘하고 내일 아침에 수술하자고 하셨다. 




 정신없이 와서 입원 준비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CT 찍을 때쯤 걱정돼서 따라왔던 와이프가 이것저것 챙겨다 주긴 했는데 밖에 엄청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병원은 코로나로 인해서 외부인의 면회가 금지였다.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일단 진통제를 계속 맞았는데, 진통제가 아무리 들어가도 담석으로 인한 고통은 별 차도가 없었다. 


 결국 수술준비를 위해 금식도 하고 편안하게 자야 했지만 고통에 뒤척거리는 밤이 됐다. 그리고 수술의 날이 밝았다.


수술날 아침. 이유 없이 팔을 찍어봤다.


 어이없게도 쓸개의 고통은 수술날 아침이 되자 좀 잦아들었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전신마취를 해본 적이 없었다. 와이프 말로는 마스크 같은 걸 쓰면 슉 올라와서 훅 간다는데 실감은 안 났다. 딱히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이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잦아들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담석으로 인한 고통이 있었고 이 고통만 없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되고 나는 수술대에 누웠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붙이더니 커다란 하얀 물약이 들어있는 주사기를 내 링거에 연결해서 주사를 했다. 그리고 갑자기 정신이 뿌옇게 변하더니 어느새 침대에 몸을 굴려서 눕고 있었다. 병실이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난 모양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와이프가 내 쓸개에서 나온 돌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놀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여줬던 영상이나 자료들처럼 조그만 돌멩이 몇 개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돌멩이 한 개였다. 내 엄지손가락 한마디 만 한 엄청 큰 돌이었다. 그게 뱃속에 있었으니 안 아플 리가 있나.

 



 아무래도 배를 찢었으니 아프긴 아팠다. 심지어는 내 배꼽모양(?)의 문제로 무통주사도 2개 중 하나밖에 쓰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쓸개의 그 고통은 사라졌으니. 많이 아프면 무통주사의 버튼을 누르라고 했는데 뭘 어떻게 해도 담석이 있을 때에 비하면 훨씬 안 아팠다. 호기심에 한번 눌러본 것 빼고는 무통주사의 버튼을 누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 전신마취 수술이자 입원수술은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타이틀을 얻었다.

 "쓸개 빠진 놈"이라는 뭔가 불명예처럼 보이는 타이틀을. 


 이번에 알게 된 게 더 있었다. 위경련 이전에도 나는 가끔씩 자고 일어나면 날개뼈 밑의 등부분이 아프다던가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나는 그걸 단순히 근육통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거의 쓸개와 담석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생각보다 오래 나를 괴롭혀 온 셈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근육을 주무르고 몸을 푼다고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고 위장을 탓하며 전전긍긍했었다. 물론 먹는 것의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회복은 빠른 편이었다. 이미 수술한 그날 열심히 걷기 시작했고 다음 날 많이 멀쩡하게 돌아다녔다. 그 사이 내가 있던 4인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왔다. 어쩌다 보니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담낭염이었다. 그리고 차례로 수술을 하고 돌아왔다. 갔다 온 분은 나에게 자꾸 물었다. 이거 원래 이렇게 아픈 거냐고. 너무 고통스럽다고. 나는 난감했다. 나도 배 수술부위의 통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원래 있던 담석 통증에 비하면 이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라 딱히 아프다고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수술을 준비하러 미리 입원했을 때 내가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던 모습을 본 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수술 당일 왜 저리 전혀 아파하지 않았던 것일까. 심지어 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무통주사를 2개씩 맞았는데. 그런데 다들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이거 담석이 막혀서 급성담낭염 왔으면 지금 배 아프신 거 2배 이상으로 아프거든요. 저는 정말 배를 잡고 굴러다녔어요. 이 정도는 괜찮구나 하고 위안으로 삼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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