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록 모르는 척하는 이유
어릴 때 우리 집은 상당히 시골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읍면 소재지를 넘어 '오름'자락에 있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살았다. 물론 나보다 더 시골에 살았던 사람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가까운 마을조차도 걸어가려면 멀었다. 심지어는 그 마을도 30 가구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도 격차는 존재했다. 누구는 조금 더 집이 괜찮고 더 깨끗하게 하고 다녔고, 누군가는 좀 더 힘들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그런 관계로 서로 보고 지냈기에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당시 '읍사무소'가 있던 '읍내'로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도 가난은 있었다. 어떤 친구는 부모님이 일본으로 돈 벌러 가서 몇 년에 한 번밖에 볼 수 없었다. 친척이 돌봐주었는데 아무래도 그리 넉넉지는 않아 보였다. 옷을 거의 똑같은 것만 입고 다녔으니까. 배를 타는 부모님들도 많이 계셨는데 그런 친구들 중에도 아버지가 가끔 집에 와서 물건을 부수고 애들을 때려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친구는 정말 어렵게 지냈는데 사실 아빠는 건물도 있고 자영업자 사장이었지만 다방 아가씨와 살림을 차려서 나가버리는 바람에 엄마와 둘이 지내고 있기도 했다. 지금 대략 나열한 것도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 좀 흔한 케이스였다. 그 시절 그곳은 그랬다. 10대에 이미 부모님이 안 계시고 형이랑 둘이 살면서 학교를 잘 안 나오는 친구도 있었고, 말 그대로 돈이 없어서 학교를 안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격차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시골의 도시', 그러니까 제주도에서는 나름 도시였던 제주시의 학교로 진학하게 되는 시점이었다.
제주도의 시스템은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곧 제주시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외에도 인문계가 있는 '종합고등학교'라든지 서귀포시에 인문계 고등학교가 하나 정도 있었던 것 같지만 보통 그렇게 통했다. 지금이야 제주도 가본 사람이 많아서 제주도 안에서 제주시 가는 걸 무슨 옆동네 가듯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진짜 멀고 먼 길이었다. 지금처럼 도로도 정비가 안되어있던 시절이고 차가 넘치듯 흔한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제주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제주도의 '시골 아이들'과 환경에 큰 차이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난의 기준부터가 달랐다. 내가 겪거나 봐온 가난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난의 기준 최하점보다 밑에 있었다. 친구 중 누군가가 힘들다고 고백하듯이 말하지만 운동화는 '메이커'였다. 내 어린 시절 동네에서는 '아티즈'니 '타이거'니 하는 걸 신는 아이들도 많지 않았다. 그냥 이름 없는 운동화를 사서 1년이고 2년이고 뜯어질 때까지 신었다. 아니 한동안은 뜯어져도 완전히 닳아서 구멍 나지 않는 한 본드로 붙여서 신고 다녔다. 깔창만 다 닳아서 새로 사는 경우도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은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들도 그런 사람들의 일부가 되려 노력했다. 자신들의 기준도 바꾸고, 그 정도의 사람인 것처럼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난하면 그럴 수 없었다. 주말마다 동아리 활동이나 학교 관련 활동을 가려고 해도 차비가 없어서 못 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 가난한 사람이 많지 않으니 대부분의 학교 활동은 그런 기준에 대한 배려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예 그럴 거라고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가장 긴장했던 부분은 내가 진학했던 학교는 당시에는 드물게 수학여행을 '외국'으로 가는 학교였다. 그래서 참가 못하는 학생이 매년 꽤 발생하는 그런 학교였다. IMF에 감사한 몇 안 되는 지점이었다. 덕분에 국내 수학여행이라 어렵지만 어떻게든 부모님이 보내주셨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외국으로 여행을 가지 못한 많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기회'를 박탈당했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봄, 내가 처음으로 가난의 격차를 제대로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시골의 도시였던 제주도와 제주시를 떠나 학교를 멀리 광주로 진학했다. 도시의 크기 면에서 제주시와 비교가 안 되는 크기였다. 그리고 격차는 다시 한번 벌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학교 친구들은 술을 먹고 나면 '가난 배틀'을 벌일 때가 있었다. 술김을 빌어 자신들의 불우한 환경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꽤나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대학생쯤 되면 다들 자신들의 우선순위가 있었다. 진짜로 생활비를 벌면서 학교를 다니는 애들은 극소수였다. 밥 먹을 돈 없다면서 얻어먹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건 돈 모아서 수십만 원 짜리라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밥 먹을 돈이 없는 것은 '할 걸 하고 나서' 없는 거였고, 보통 내가 아는 밥 먹을 돈이 없는 것은 밥 먹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더라도 없는 경우였다.
물론 좀 다른 이야기지만 '불량 배틀'은 그것대로 곤혹스러웠다. 술도 덜먹은 20대의 호기로운 젊은 패기는 자기 친구 중에 얼마나 많은 '조폭'이나 '양아치'가 있는지를 자랑했고, 은근슬쩍 자기가 나쁜 짓도 할 거 다 하고 살아온 것처럼 어필했다. 나중에 나이를 더 먹으면서 그게 대부분 허세 거나 '도시전설'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나도 20대가 되어서 가끔 제주도의 고향에 가면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단란주점 웨이터로 근무하는 녀석도 있었고, 중학교 중간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뭔가'를 했던 놈들은 그걸로 자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멀쩡하게 졸업하고 살고 있는 애들도 있었지만 그런 애들은 동네로 잘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나이가 먹으면서 조금씩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가난의 격차를 서로 간의 격차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뜬금없지만 사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다. 그래서 서울에 친척도 꽤 있고, 누나의 경우도 서울로 학교를 갔다. 하지만 서울에서 길게 살아본 적은 없다. 기껏해야 한두 달 친구집에 있다 내려온 경우가 전부일뿐이다. 하지만 서울과 광주의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씁쓸하지만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골의 시골'의 가난에 대해서 평균적인 서울에 사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어떨까.
마치 '남극 대륙에는 이런 종류의 미생물이 삽니다'같은 느낌이 아닐까 싶다. 같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범위'에 없는 이야기니까.
그 사람들을 미생물처럼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아예 와닿지를 않는다는 이야기다. 나와 상관없는 세계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래서 전혀 상정조차 되지 않는 딴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리면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걸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만일 그런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가난만 가난이 아니라고. 그런 걸로 강요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나와 버리면 자신들의 불만족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배려받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모르고 싶던 것도 알게 되는 시대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그 전부를 이해하기보다는 객체화시켜버리고 자신의 주변에서 인지하는 범위로 다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과 수많은 정보를 통해서 가난의 격차를 확인할 방법이 더 많아졌지만 더 소외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