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의 덕후
사실 취향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그랬다.
선택지가 없으면 취향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잉여'가 없던 시절의 우리는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어려웠다. 나처럼 286과 386을 경험한 대부분이 어린 시절의 컴퓨터를, 그리고 키보드를 회색빛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기계식 텐키리스 키보드를 샀다.
글 쓰는 사람들은 의외로 텐키리스 키보드를 많이 쓴다고 한다. 사실 나는 잘 몰랐다. 기계식 키보드를 써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텐키리스 키보드'는 뭔가 어쩔 수 없이 쓰는 거였다. 14인치 노트북의 단점으로 텐키리스 키보드를 꼽는 사람이 많았던 기억도 난다.
그 이전에 쓰고 있던 '멤브레인' 방식의 키보드에 사실 크게 불만이 없었다. 그리 시끄럽지도 않고 어차피 내가 키보드를 끝까지 누르지 않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신경을 안 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많이 쓰고 나면 손가락이 아픈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은 모른다. 경험해보기 전까지. 아주 비싼 키보드가 아닐지라도 다른 방식의 키보드를 자주 만지지 않으면 그렇게 불만이 없다. 심지어 그 키보드 이전에 쓰던 키보드는 내가 마음에 들어서 거의 5년을 썼는데 주변 사람들은 불편하다고 난리였다. 내 취향이 남들과는 그리 맞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은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 사람들은 '무접점' 방식의 키보드를 선호한다. 대부분 가격대가 좀 있는 무접점 키보드지만 그만큼 '타건감'과 '소음'을 둘 다 잘 커버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의외로 카페에서 글을 자주 쓰는 편이지만 나는 그냥 간단한 블루투스 키보드를 더 선호한다. 예를 들자면 '국민 블루투스 키보드'로 불리는 로지텍의 K380처럼 무난한 제품으로...
사실 블루투스 키보드 자체에서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휴대성'과 '블루투스'가 잘 되면 그만이었기에 그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직접 사용해 봤을 때 오히려 그보다 가장 거슬렸던 것은 카페의 테이블과 의자 높이에 의한 사용성이었다. 테이블 높이가 맞고 흔들림이 적은 곳이라면 웬만한 블루투스 키보드는 다 쓸만했다. 지금 이 기계식 키보드에 익숙해진다면 이상하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예전 글에서도 조금씩 힌트가 보였겠지만 나는 '알리'에서 물건을 많이 사는 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가격이 워낙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성능이 개판인 '예쁜 쓰레기'들을 많이 샀다. 그런 디자인적 취향에 꽂힌 사람들이 많다는 걸 다들 알기에 겉보기에만 멋있는 제품들을 많이들 생산을 하고 있다. 내가 그게 가장 심했던 케이스라면 역시 이어폰이었다. 지금처럼 상향평준화가 이뤄지기 전의 이어폰들은 정말 디자인은 예쁜데 소리는 '장난감'수준인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잉여가 넘치다 보면 '예쁘고 좋은' 물건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만큼 비싸다. 지금의 키보드 시장도 그렇게 됐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쓴다는 키보드들은 기본적으로 10만 원대 중반 이상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글을 직업으로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비싼 30만 원 이상의 키보드를 더 많이 쓴다. 그리고 그 틈새의 시장에 디자인을 파고들어서 심미적 기준을 더 충족시키고 기능성에서는 약간 밀리더라도 포인트를 주는 제품들이 많이 나온다.
그럼 사람들은 결국 그런 제품을 '예뻐서' 산다. 그리고 막상 쓸 때는 쓰기에 좋은 제품을 쓴다.
예전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성립조차 하지 않았던 많은 물건들에 '잉여'가 생겼다. 그리고 그와 함께 '취향'이라는 것도 생겼다. 우리는 '쓰기 편한' 것만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디자인'의 역사적 방향 자체가 단순히 실용성만을 추구했다면 이렇게 발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잉여가 취향을 만든다.
어릴 때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살 때는 고민할 게 별로 없었다. 어차피 제품이 몇 개 없었으니까. 문방구에 있는 제품들도 엄청나게 다양하지도 않았다. 살 돈도 별로 없었지만. 그 시절에도 누군가는 디자인을 보고 물건을 골랐을 것이다. 내가 '잉여'가 아니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잉여'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 덕분에 물건의 외형이 계속 바뀌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예전에는 '사치품' 시장에 밖에 없었던 '취향'의 세계가 지금은 모든 물건에 적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에 취향이 생기고 있다. 동네에 유일한 햄버거 집이 '아톰프라자'라서 모든 햄버거가 그렇게 생기고 그런 맛인 줄 알았던 시절은 이제 없다. 우리는 수많은 햄버거집들을 비교하고 심지어 같은 가게에서도 여러 종류의 햄버거를 비교한다.
심지어는 화장지조차 향과 두께, 그리고 사용감을 비교한다. 작은 물건 하나하나 취향이 발동한다. 지나가다 받은 종이컵 하나에도 디자인을 보게 된다. 몇 분 사용하지도 않을 일회용품이다 하더라도 취향이 있다. 그냥 있는 거 아무거나 쓰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줄어들고 있다. 조그만 것 하나라도 '꿀템'과 '꿀팁'들이 넘쳐난다.
내가 품을 들여서 일일이 비교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수많은 리뷰어들, 수많은 유튜버들이 자신들의 취향을 공유하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여러 가지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물론 그 리뷰와 취향을 검색하는 또 다른 수고로움이 필요하지만 솔직히 가만히 앉아있어도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량이 이미 한계치를 넘어섰다. 심지어는 내가 취향인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취향이 되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에 취향이 생기고, 모든 것들의 덕후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