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인 걸까 불만족인 걸까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하는 것도 좋지만 듣는 것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지만 아마도 그 영향 중 하나는 어린 시절 집에 있던 켄우드 전축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빵빵한 음량으로 듣던 시디의 음질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 뒤로 카세트의 시대가 왔지만 모노 이어폰으로는 전축 같은 시원시원한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라디오도 스테레오로 듣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워크맨을 필두로 얇고 소형화되던 카세트가 점점 CDP에 먹히고, MP3가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다. 음원이야 사실 CD 음질로 충분했지만 그와 함께 점점 이어폰들도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갈수록 좋은 음질로 음악을 듣게 되었기에 고민 고민 끝에 이어폰을 손에 넣었는데 쉽게 고장 나 버려서 우울했던 기억도 있다.
'에어팟'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코드리스 이어폰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에어팟'의 가격은 결코 저렴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금전 감각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누군가는 그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가성비'라는 말은 아예 성립도 안 된다. 막말로 만수르 앞에서는 벤츠와 BMW, 포르쉐 같은 차들이 전부 다 가성비 제품일테니까.
결국 일반적으로 봤을 때 '에어팟'이 나오고 갤럭시 버즈 같은 것들이 나올 때 코드리스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시대가 급변하고 어린 시절 워크맨으로 들었으면 눈물을 흘렸을 수준의 음질을 지금 우리는 무려 2만 원도 안 되는 '코드리스 이어폰'에서 듣는다. 정말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전히 DAC와 결합한 유선 이어폰이 더 우월한 음질을 보여주겠지만 편의성과 여러 측면에서 아무래도 코드리스를 선호하게 된다. 괜히 더 힙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거기다 웃기게도 가격적으로 오히려 DAC와 결합하게 되면서 유선 이어폰이 더 비싸게 되어버렸다. 거기다 이제 더 이상 스마트폰들이 3.5파이 이어폰 단자를 지원하지 않다 보니 더욱 그렇다.
예전에 웬만한 몇만 원 대 유선 이어폰보다 지금의 만원 짜리 코드리스 이어폰이 더 흔하면서도 음질도 편의성도 좋다. 그리고 예전에도 다룬 적 있는 QCY 같은 업체들이 뛰어들면서 이미 2만 원 이하에서 '음질'이나 '공간감'같은 것을 충분히 논할 수 있는 수준을 제공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막귀니까 그냥 듣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음질 자체가 좋다.
나 역시 그 덕분에 어릴 때부터 원했던 좋은 음질의 음악 감상이 가능해졌다. 그것도 엄청난 돈을 들이지 않고도. 비교적 더 많은 돈을 써서 나보다 더 좋은 음질을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맥시멀리즘을 달성할 수 없는 '가성비'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성비'로 코드리스 이어폰을 듣기 시작했다. 사실 그놈의 가성비를 따지며 그 이전에 몇 년간 이미 1만 원대 유선 이어폰이 10개가 넘게 모았지만 말 그대로 가성비였고, 그중에서 들을 만한 음질은 1-2개 수준이었다. 그런데 코드리스가 불 붙듯이 올라오면서 갑작스럽게 가성비에서 유선 이어폰을 따라잡아버렸다.
발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제품은 QCY의 T1이었다. 나도 거의 1년 이상을 썼던 정말 당시로는 충격적인 제품이었다. 너무 음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이전까지의 가성비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파괴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작 T1을 사기 몇 달 전에 내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5만 원대 코드리스를 샀었는데 음질 수준이 처참했다. 거기다 블루투스 연결이 뚝뚝 끊기는 건 덤이었다. 그래서 내게 코드리스는 최소 에어팟이나 비싼 갤럭시 버즈 같은 것으로나 누릴 수 있는 기술이라고 판단을 했었다.
그런데 고작 1만 원대의 QCY T1이 그걸 완전히 깨버렸다. 그리고 편의성도 뛰어난 편이었다. 나는 그 뒤로 QCY의 코드리스를 몇 번을 더 샀다. T5가 한 번 더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고 해서 구매했고, T9s가 다시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또 샀다. 그래도 T1은 1년 가까이 들었고, T5는 심지어 중고로 샀기에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T9s도 반년 이상 애용했다.
그런데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던 QCY는 또 말도 안 되는 발전을 이뤄냈다. 그게 T13이었다. 들어보고 진짜 충격받았다. 그리고 문제는 물가가 올라가고 있는데 QCY의 제품들은 여전히 2만 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리고 성능은 몇 배는 좋아졌다. 불과 몇 년도 걸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심지어는 T13을 쓰면서 너무 만족하고 있었는데 반년도 안돼서 T17s가 또 나왔다. 음의 해상도가 개선되면서 여전히 2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음질은 이미 '에어팟' 수준에 가까워져 있었다.
사실 나는 2년 전에 산 T9s에 만족하고 있었고 아직 고장도 안 나서 T13을 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가성비'였기 때문에 너무 사고 싶었다. 그리고 그만큼 만족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T13이 진짜 만족스러운 제품이었고 몇 달 듣지도 않았는데도 T17s의 평이 너무 좋아서 사고 싶었다는 게 문제였다. 비싼 거면 더 고민했을 텐데 가격이 여전히 2만 원이 안됐다. 밥값이 최소 7-8000원인 시대에 한두 끼 덜 먹으면 저 좋은 음질의 코드리스가 내 손에 들어온다니. 그 유혹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분명히 '가성비'를 이야기하는 사람인데 멀쩡히 돌아가는 코드리스 이어폰이 거의 10개 가까이 되었다. 위에는 QCY의 이야기밖에 적지 않았지만 2-3만 원대 가성비 코드리스 타제품도 몇 개를 샀기 때문이다. 단, 나는 철저히 가성비를 고집했기에 3만 원이 넘어가는 제품을 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 내가 최근 몇 년간 산 가성비 코드리스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너무 좋은데 여러 개가 있다 보니 내가 들을 일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일도 있었다.
이쯤 되고 보니 내가 가성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과소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성비를 따진다는 것은 결국 돈을 아끼겠다는 것인데,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다른 '가성비' 제품을 살 이유가 있을까?
결국 좋아하는 것에서의 '가성비'라는 것은 '불만족'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게 불만족스럽거나 고장 나서가 아니라, 더 좋은데 가성비가 있다면 구매하게 되는 거였다. 그건 내가 그 '분야'를 관심 있게 보고 싶고 더 좋은 것을 쓰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경제적 여건 때문에 '가성비'를 이야기하게 되면서 말이다. 아마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했다면 그런 가성비조차 따지지 않고 더 좋은 것을 추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전 글 중에 필요 없는데 갖고 싶어라는 글에서 이미 나의 '장비병'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었다. 물론 거기서 다뤘던 제품은 무려 '노트북'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내가 노트북에 별 관심이 없다면 두 번째 노트북이 아무리 가성비가 좋다 한들 지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결국 내 지름신은 나의 '관심'에 대한 문제고 내 '가성비'라는 변명은 그 지름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제는 가성비라는 말의 기준이 뭔지 애매모호해졌다. 예전에는 정말 바라고 바라던 끝에 누릴 수 있던 것들이 '가성비'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해외 직구가 일반화되면서 엄청난 거품들이 빠져나갔다. 특히 중국과의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가성비 전자제품은 쏟아지고 있다. 나같이 좋아하는 게 많은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좋으면서도 괴로운 일이다.
돈을 모으고 모아서 게임팩과 게임 시디를 사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1년간 용돈을 모아서 게임기를 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할인하기 때문에' 스팀에서 저렴할 때 게임을 산다. 일단 샀는데 문제는 그렇게 사놓고 하지는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가끔 스팀 라이브러리를 인증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중에 안 한 게임의 비율이 상당하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완전히 만족할 만큼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가성비'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는 만족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경제적 여건에 막혀있던 것들을 가성비를 따져가며 원하는 걸 구하기는 쉬워졌다. 그런데 그 관심도를 다 채울 만큼의 시간이 없어졌다. 그래도 그 감당하지 못할 것들을 놓치면 아까운 '가성비'라서 꾸역꾸역 모으고 있다. 과연 이게 가성비일까. 아니면 욕심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