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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인 Mar 04. 2023

조그맣고 노란 종이 조각

오랜만에 발견한 것들은 반가울 때가 많다.

나쁜 기억이 없다면.








와이프가 회사에 있던 책들을 정리해서 집으로 가져오던 중에 뭔가를 내밀었다. 


무엇인가 적혀있는 조그맣고 노란 네모난 종이 조각. 포스트잇이었다.


받고 나서 3초쯤 지나서야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무더운 여름이었다. 


사귄 지 1년쯤 되어 가던 우리는 말 그대로 '한참 좋을 때'였다.


그 해 여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이라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학교에서 어찌어찌 지원을 받아 수업에서 친해진 형들과 일본으로 3박 4일 일정을 어렵사리 마련했다.


들뜬 기분도 있었지만 나는 사실 걱정이 앞섰다.




반년 전 명절, 집이 제주도였던 나는 일주일이라는 상당히 긴 일정으로 고향을 방문했다. 부모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성수기의 비싼 비행기표를 피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렇게 제주도의 명절 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자친구는 나에게 이별을 '통보' 했다.

내려가서도 매일 연락을 하던 나였는데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헤어지자던 이유는 간단했다. 여자친구는 외로움을 잘 탔다. 그래서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놀러 간 것도 아니고 명절에 집에 간 것인데도 그랬다.




어찌어찌 잘 이야기하게 되어 그 상황은 넘겼지만 그 뒤로 나는 고향인 제주도를 길게 방문하는 일이 없어졌다. 굳이 헤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면 그런 시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일본을 가는 3박 4일은 짧지만 여자친구에게는 위험한 기간이었다. 

나는 정말 걱정이 됐다. 일본 일정은 제주도처럼 가까운 것도 아니라서 더 고민이었다.


그때 생각했던 것이, 여자친구의 자취방에 포스트잇을 숨겨놓는 거였다. 내가 갔다 올 동안 그 포스트잇을 하나씩 찾아보라는 의미로. 곳곳에 여러 가지 글을 적은 포스트잇을 숨겨놨었다. 




벌써 17년 전 일이다. 


그때의 여자친구는 와이프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째를 안절부절 보내는 나이가 되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노란 종이조각은 우리를 17년 전 그 여름으로 데려다 놓았다. 


나는 그게 왜 아직도 있냐며 약간 창피했지만 와이프도 나도 잠시나마 그때를 기억할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따뜻하다고 느꼈던 그 시절을.








여담이지만 와이프는 그렇게 나랑 떨어지면 불안해했지만 몇 년 후 무려 8개월을 혼자서 미국을 가버렸다. 내가 떨어져 있는 게 문제였지 본인이 떨어져 있는 것은 매우 잘 버티더라... 


그리고 차마 그때의 그 포스트잇을 찍어서 올리지는 못하겠다. 지금 보니 너무 오글거린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의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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