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는 모든 감정은 학대다
제목도, 소제목도 자극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극적인 제목을 써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제 글은 전체적으로 항상 개인적인 의견을 담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특정인'이나 '불특정다수'를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이유는 글 내용이 그러한 상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나마 교육에 몸을 담고 교육을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국수본' 임명 문제가 자녀 학폭과 연계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불이 붙었습니다.
여느 때라면 언론에서 쉬이 묻어버렸을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한참 인기를 끌고 있던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와 겹쳐버렸습니다. 세상의 '연진이'들이 난감해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이 드라마의 영향은 식어버리기에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시즌 1의 여운이 남아있고, 시즌 2가 들어오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결국 국수본 임명자는 사퇴했고, 그 일들은 유야무야 넘어갈 것 같습니다. 아마 최대한 시간을 끌면 해결될 문제일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어린 시절 학교 폭력 가해자들은 조금 더 환경의 영향을 받은 비행청소년이 많았다면 지금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권력의 맛'을 본 가해자들입니다. 모두들 혹시라도 자신들에게도 권력의 단맛이 오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시대에서 권력을 겨누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가기 전에 돌아오자면, 이러한 권력은 '보수적 권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고죄'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꽤 된 일입니다. 주병진 씨가 무고로 인해서 고통받았던 게 벌써 수십 년 전이니까요. 그러한 무고는 해결되기는커녕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되기에 가장 간단한 방법이니까요. 상대가 권력자만 아니면 무고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가해의 권력 사다리는 이렇게 됩니다.
권력자 - 무고 가해자 - 평범한 피해자
여기에 왜 사회적 약자를 피해자로 넣지 않았냐고 하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아마 글을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읽어보셔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서로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은 사다리에 넣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죠.
권력자에 대해서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가장 어쩔 수 없는 집단입니다.
사람들이 '더 글로리'를 아무리 열심히 보고 그걸 토대로 성토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의 권력 지향형 속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아마도 권력자에게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강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권력의 사다리 위쪽에 포진한 사람들이 이미 그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사람들은 알고는 있습니다. 어설프게 미화되어 버렸지만 최소한 '꽃보다 남자'같은 만화나 드라마에서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있는 집 자식의 문제를 말이죠. 그게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에서 같은 플롯을 써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즉, 거의 기본적으로 권력이 가지는 폭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고 가해자는 조금 영역이 다릅니다.
사실 무고 가해자는 피해자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북의 한 학교에서 선생님 한분이 유명을 달리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누군가가 선생님에 대해서 무고를 진행했고, 심지어 나중에 학생들이 무고였음을 밝혔음에도 교육청의 징계와 조사가 이어져 압박이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낙인을 경험하셨겠죠.
물론 학생들이 자신들이 받는 부당한 피해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은 일이나, 학생들에게도 얼마든지 그걸 악용할 의지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학교폭력 가해자가 계도를 위해 반성문을 요구하자 반성문을 쓰라는 '학대'를 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고소했습니다.
수업태도가 너무 안 좋고 교사비하발언을 자주 하는 여학생을 여선생님이 1대 1로 면담했더니 '정서적 가해'라고 고소당했습니다.
너무도 공감 가는 게, 아이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교육을 일찍 하는 것은 좋지만 초등학생들이 수업 중에 와서 장난을 치다가 조금이라도, 손끝이라도 닿으면 농담처럼 선생님들에게 '성폭력'으로 고소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미 10년도 전에 나왔습니다. 괜히 초등학교에 여선생님만 남는 게 아닙니다. 남 선생님들은 조금이라도 물리적 접촉이 있으면 가해자로 몰리기 쉬운 세상이라서 그렇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선생님이 절대 없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경계'를 구분하기 너무 어렵다는 것이죠.
교사가 피해자라면, 일반 학생들은 어떨까요? 그들끼리는 저러한 가해가 안 먹힐까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웃기게도 권력형 가해자와 무고 가해자는 얼마든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가해자들이기 때문이죠. 무고 가해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냥 피해자인 사람들입니다.
그냥 피해자가 권력자가 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그런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 바로 무고 가해자입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기본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그 피해를 상정하는 방법과 상관없이 가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테두리를 약화시키면 권력형 가해자로부터 피해를 보호하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그냥 피해자를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고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해야 할까요.
최근 진보라는 이름이 심심치 않게 가해자가 되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경계에는 이제 길다란 가시 철조망이 있습니다. 그 경계는 마치 DMZ처럼 곳곳에 지뢰가 묻혀있습니다. 심지어는 철조망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 만으로도 가시에 찔려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감정은 사실 전부 '학대'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정서적 피해를 측정할 방법이 없기에 우리는 본인의 감정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백으로 혼내준다'는 유머가 이제는 유머가 아닙니다. 진짜로 고소고발 당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기분이 나쁘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해로 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사의 면담이든 부모의 잔소리든 말이죠. 실제로 부모의 잔소리에 대해서 경찰을 부르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경계에서 물러나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