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은 태어나면 나약한 존재다.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호흡을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생물은 신체가 컨트롤 안 되는 기간 동안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 이외의 생물들의 경우는 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확률의 승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조금씩 자라나면서 우리는 대부분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은 스스로의 신체를 '컨트롤' 할 수 있게 된다. 조금씩 성능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먹고 쓰고 입고 걷는 일상생활에 큰 불편이 없는 컨트롤을 익힌다. 이러한 컨트롤이 어려운 이들을 우리는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약자'로 판단해 복지의 대상으로 둔다.
그런데 정신적 컨트롤은 약간 다르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 '중2병'.
각각 이름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미 신체를 충분히 컨트롤하게 된 이후에 정신적 컨트롤에 어려움을 겪는 시기를 이르는 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한 '특별한 이상'으로 신체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과 조금은 차이가 있다. 외관적으로는 알 수도 없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것이라서 '진단'의 영역으로 가기도 어렵다. 거기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정신과'라는 것은 가장 기피하는 병원의 영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신체적 컨트롤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이상'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컨트롤 능력은 늘지 않는다. 쓰지 않는 근육이 퇴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하지 않아서 쇠퇴하거나 발달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환경'이나 '게으름'에 의한 것일 때가 많다.
당연하게도 이는 정신적 영역에도 적용된다.
위에 언급한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 '중2병' 등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로 뇌세포의 퇴화 또는 신경망의 단절을 이야기한다.
아니 10대의 어린 나이에 무슨 퇴화니 단절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나름 타당한 연구의 결과다. 우리는 수많은 감정과 학습을 사용하지만 '뇌가소성'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프트웨어 해당하는 뇌는 '최적화'작업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누적된 데이터를 토대로 해서 우리 몸이, 아니 우리의 뇌가 사용을 안 하고 공간만 차지하는 부분들을 '대규모 패치 업데이트'로 조정하는 시기가 온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써 발생하는 감정 컨트롤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게 이렇게 일반적인 현상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걸까?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라는 환경에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정도의 시대에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대상으로 감정과 두뇌활동, 그리고 사회적 영역을 학습한다.
그래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사춘기'와 같은 '패치 적응기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패치 적응기간이 일시적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회에서 달리기가 느리다고 해서 죽을 만큼 힘든 일은 없다. 정글에서 육식동물에게 쫓겨 다니는 삶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건강상의 문제라면 발생할 수 있지만.
또한 꼭 던지는 물건을 잘 잡거나 발로 공을 잘 컨트롤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잘 컨트롤하면 더 좋겠지만 꼭 그 수준이 아니어도 사는데 불편함은 없다. 그래서 모두에게 꼭 일정 이상 수준의 운동능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거기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나이가 먹고도 조기축구회를 나가고 피트니스 센터를 다니고 테니스, 등산, 등등 수많은 스포츠들을 통해서 꾸준히 신체 컨트롤을 업데이트한다. 물론 수명이 다된 부품들로 인해서 고생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감정 컨트롤은 어떨까? 사람들은 나이가 먹으면서 감정 컨트롤 훈련은 얼마나 하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거기에 신경 써서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기나 할까?
누군가는 '명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는 종교활동으로, 또는 강연을 듣기 때문에 충분히 훈련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훈련은 어찌 봤을 때 정신 영역의 이미지 트레이닝과 비슷하다. 과연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우리는 얼마나 공을 잘 다루거나 근육의 컨트롤을 늘릴 수 있는 것일까? 이미지 트레이닝을 중점으로 한다면 축구 실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결국 감정적 컨트롤 역시 '실전연습'이 중요하다. 최소한 실전이 아니더라도 테니스의 '벽치기'처럼 어느 정도의 반응을 놓고 연습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감정 컨트롤은 주변,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변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핵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런데 그 연습 대상인 동시에 실제 사람들의 대부분이 감정 컨트롤에 서툴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거나 타인을 배려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예절'이라는 틀을 이용해 그런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행동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규정해 왔다. 과연 지금도 그런 예절과 규범이 뚜렷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대답은 들어보나 마나다.
그래서 연습 대상이자 학습 대상인 사람들이 컨트롤이 안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걸 거울삼아서 학습하는 학습자들은 마찬가지로 컨트롤이 안 되는 사람으로 자란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가 예절과 규범이라는 틀로 더 이상 그걸 막지도 못한다.
세밀한 감정 컨트롤은 더욱 그렇다.
누군가가 자신이 기분이 좋아지는 방법을 안다면 그 사람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먹어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비합법적인 수단을 이용해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우리가 기분이 좋아지는 활동들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신체를, 또는 정신을 망가뜨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무작정 기분을 좋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그걸 사용하는 것도 어렵다. 그에 대한 내용은 얼마 전에 다뤘던 '역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익숙해지면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즐거워지는 법'이 아니라 '컨트롤'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냥 즐거워지는 것만 고민하는 것과 다르게 지속 가능하고 외부의 환경이나 요인들에 대해서 회복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컨트롤을 익히지 못했거나 다른 컨트롤 안 되는 사람들과의 교류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이제 '단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굳이 타인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 빈도를 줄이겠다는 의도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나쁜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고 '좋은 면'만을 보려고 하기도 한다. 또는 맹목적인 믿음을 빌어서 다른 것들을 생각의 대상에서 배제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시기일수록 사이비나 사기꾼이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