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여기서 왜 나와?
일전에 쓴 글에서 게이미피케이션과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피드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피드백 이전에 시행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죠.
그건 우리가 행위의 과정에서 '무엇을 인식하면서 하는 것인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결론만 먼저 말씀드리면 우리는 목적 자체를 개개인에게 인식시키지 않고 그것을 게임의 '룰'로 만들어서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팀워크 게임을 기획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대부분의 게임들은 재미를 위해서 갈등 및 경쟁 과정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에 대한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이 있죠. 어떠한 팀에서 팀빌딩 게임 과정을 진행할 때, 당연히 그 과정에서 팀원들 간에 감정싸움이 발생하는 것을 특별히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 감정이 부정적 감정을 끌어당기는 상황을 막고 싶은 것이죠. 당연히 그러한 감정은 팀워크를 위한 서로의 관찰에 대해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게임 안에서 과다한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요소를 자제하거나, 또는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합니다. 또는 '퍼실리테이터'와 같은 외부 개입적 인물이나 요소를 사용해서 중간에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죠.
대부분의 게임이 1차적 목적뿐 아니라, 이중적인 목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나 경쟁이 재미 요소로 작동하더라도 경쟁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거죠. 경쟁이 승리를 위한 재미요소로 작동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경쟁을 향한 열망이 주변을 관찰하고 학습하고 협력하는 행동을 끌어내는 '방아쇠'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팀 게임에서 주변과 협력하지 않고 과연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요?
사실 교육용 게임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목표를 사전에 완전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궁극적인 모든 목표와 피드백 내용을 먼저 다 이해해야 한다면 재미를 떨어트릴 요소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관찰하라'라는 명령을 하는 것보다 관찰을 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편이 능동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능동성은 행위 자체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죠. 수동적일 때 피곤하거나 귀찮은 일들도 재미에 의해 능동적으로 진행한다면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는 인지 및 관찰적인 요소에 대해서 사람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로 빠르게 색인화를 하고, 자신과 유형을 일치시켜서 사람을 찾고자 합니다.
얼마 전부터 '유행한' MBTI도 그렇습니다. 사실 MBTI라는 방식 자체가 194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형태에 가깝게 편성된 것도 이미 1980년대의 일이라 이미 거의 4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죠. 어떻게 활용하나의 문제라고 누군가 이야기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도 DISC, 애니어그램 등과 함께 중고등학교 수련회의 필수 코스의 하나였습니다. 그때 수많은 검사를 거쳤던 사람들이 그 영향 그대로 살고 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지금쯤은 아주 유의미한 통계가 나오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를 '대중심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인간의 존재나 가치를 규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많은 관찰과 커뮤니케이션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각광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의 '유용성'은 그것의 '신뢰성'이나 '정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수많은 교육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측정형 분류 프로그램'이 간편하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게이미피케이션으로 프로그램을 다루기 이전에 프로그램의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에서 '룰'이라고 부르는 가이드를 세우죠. 이러한 룰은 어떠한 행위를 강제하려는 목적보다 울타리에 가깝습니다. 자유도와 선택지를 줄여서 예측 가능한 '다이내믹', 즉 참여자의 행위를 유도하는 거죠.
그리고 그러한 다이내믹의 결과에 따른 피드백이 들어갑니다. 이러한 피드백이 가능한 이유는 강사의 순발력도 존재하지만, 그들이 메커니즘과 다이내믹으로부터 유도되는 '에세틱', 즉 감정적 결과의 범위를 어느 정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에세틱과 그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본인 또는 타인에 대한 관찰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일련의 사람들에게 타인과 조직, 또는 협업에 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단번에 이 사람은 이런 유형이니까 또는 혈액형이 뭐니까 이렇게가 아니라, 직접 부딪히는 과정에서 느껴지고 관찰하는 방식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죠. MBTI와 같은 검사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셀프 체크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가 게임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하는 관찰 대상 중 하나는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40-50이 먹고 나서도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곤 하죠. 그나마 깨달으면 다행이지만 죽을 때까지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또는 매우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요. 이러한 부분은 '교육'에 의한 부분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이슈가 자기 계발 시장과 교육 이슈를 선점했을 때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의 비유처럼,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지 고래가 해야 할 걸 잘 알게 하거나 더 보람찬 고래로서의 삶을 살게 해주진 않는 거죠. 칭찬이 부족해서 슬픈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은 감정적인 공감인 것이지, 그들의 인문학적 소양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에 대한 좋은 사례를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반대의 사례도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고요.
어떠한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에세틱의 종류는 많습니다. 하지만 특정 행동을 통해서 얻는 에세틱들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죠. 트롤의 심리학이라든가 협동 게임에서 갈등이 생기는 사례 등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한 에세틱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깨닫고 배우게 되는 것이 우리가 게이미피케이션을 교육에 끌어들이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19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소개해드릴 HRD게임들도 대부분 그러한 과정에서 개발되고 연구되어 1970~80년대에 기업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던 프로그램 들이죠. 현대에 새로 개발된 게임들도 큰 틀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교육용 게임의 틀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결국 같은 게임을 즐기더라도 거기에 어떠한 목적과 피드백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게임에서 얻는 인스턴트적인 즐거움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목적이 없어도 게임은 즐거운 경우가 더 많겠지만요.
심지어 우리는 이러한 게이미피케이션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게임으로부터 인문학 추출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것이죠. 물론 매번 게임을 할 때마다 게임에서 발생하는 에세틱을 다 분석한다면 게임이 재미없죠.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즐기는 게임을 분석해 볼 수 있다면 감정의 소모로만 게임이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상문을 적은 책들이 머릿속에서 그냥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저번에 다루기로 했던 게임을 잊어버린 건 아니고... 사실 몇 가지 글을 써보고 어떤 것을 먼저 언급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 부분은 먼저 설명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여 먼저 글을 올립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말만 하는 게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꼭!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콘텐츠,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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