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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May 01. 2022

최윤,『소유의 문법』

세상의 기준과 ‘그러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다양한 시각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충돌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충돌에서 나오는 의견과 토론으로 우리 점차 아주 느리게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거겠지. 하지만 요즘 보이는 여러 혐오와 상대편에 대한 비방, 끼리끼리의 결탁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예전에 읽었던 이 소설이 떠올랐다. 




소유의 문법」 최윤

세상의 기준과 그러나’ 


    세상의 기준


  ‘정상’이라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다. 이 단어는 어떤 것을 칭하는 단어 앞에 붙었을 때, ‘정상적인’은 긍정적으로 ‘비정상적인’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전적으로 세상은 다수의 기준인 것이다. 

  낯선 단어 조합으로 이루어진 제목, ‘소유의 문법’ 또한 그러하다. 같은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들끼리 약속한 규율인 문법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작가는 계곡 마을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외부인인 주인공을 통해 관찰시킨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암묵적 규율과 행동을 보며 그 안 투영된 계급과 소유를 위한 다수의 결탁이란 사회적 면모를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나’는 원래 도시에 살던 사람이다. 딸 ‘동아’의 자폐증 증상으로 인해 새로운 보금자리에 대해 고민하던 중, 과거 은사였던 P 교수의 제안으로 S 계곡마을로 이사하게 된다. 나는 두 채인 은사의 집 중 하나인 산 밑 집에 딸과 함께 살게 되며 호전되는 딸의 상태와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에 만족감을 느낀다. 그러다 나는 마을 사람들의 제의로 또 다른 교수의 집인 장 선생의 집에서 의자 강의를 하게 된다. 강의가 끝나고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p 교수가 이 집을 장 선생에게 양도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직접 들었다는 문서에 사인을 하라는 제의를 받는다. 나는 제의를 거절하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한다. 그 제의 이후 와이파이가 통제되어 마을 카페를 자주 찾게 되는데, 그 카페 주인에게서 마을 사람들의 추태나 비밀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 마을에 온 지 2년째 되던 여름, 동아의 자폐증 증상으로 차를 타고 마을을 나온 사이 마을이 침수되어 버린다. 그 이후 마을로 돌아간 적은 없으며 나는 시간이 지난 후 한 잡지사 청탁을 받고 이 마을을 떠올리며 원고를 쓴다.        




) K 산 밑 집과 산 위의 집      


  "무엇보다도 계곡의 경치가 잘 보이고 빛이 더 잘 들어오도록저 대목께서는 이러한 구조변경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걸까그러나 그의 침묵의 권위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S 계곡 마을은 위에서 아래로 경사진 구조이다. 장 선생의 집은 산 깊숙이 있어 산 위의 집이고 나와 다른 마을 주민들이 사는 집은 ‘산 밑 집’으로 칭해진다.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은 봄과 가을에 집을 많이 개조하는데, 이는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집 안으로 들이기 위함이다. 이러한 과한 개조로 집이 무너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옆 마을의 인부와 사람들은 돈과 자연의 미에 대한 욕심으로 암묵적으로 이 사실을 외면한다.  

    

  모든 세부는 계곡의 다른 집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자연의 빛과 경관이 가장 놀라운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고안된

밖에 나와서 보는 동일한 풍경에는바로 직전에 실내에서 본 그 농밀한 감동이 없었다이게 대체 무슨 조화람… 미는 위험한 것이야!”      


  나는 장 선생의 집에 가서 그 집에 있는 커다란 유리창에 담긴 계곡의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풍경에서 더 이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미 또한 성공한, 글 안에서는 ‘자격을 누릴 수 있는’ (P 교수) 이들의 것임을 나타낸다. 장 선생의 집은 P 교수의 소유로 마을 사람과 장 선생, 나에게는 ‘자격을 지닌’ 자들의 물건이지만, P 교수는 그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풍경을 본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개조하며 더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추구는 부유한 이를 따라 하는 사회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임시로 경치를 가진 장 선생은 마을 사람들과의 결탁으로 이 집의 법적인 소유권을 소송을 통해 얻어 온전히 가지고자 한다.    

 

  결말에 갑작스레 등장한 폭우는 마을 사람들의 집을 손쉽게 무너뜨리고 산의 나무들을 뽑아놓는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욕망으로 점철했던 집을, 장 선생은 창밖 아름다운 경치를 잃어버린다. 이는 자연이 아름답기만 한 존재가 아니며, 어떻게 해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장 선생과 나 


  P 교수는 조각 면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로 나와는 교류가 크게 없던 은사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계곡의 집을 빌려주면서 은인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또 다른 은사의 집에 사는 장 선생을 보고 나는 그가 아마 자신처럼 P 교수에게 집을 빌린 예술가 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이장의 집이나 그의 집에 있는 조각을 보고 미약한 부러움을 느낀다. 나와 나의 부인은 생업과 재능 등을 이유로 하던 공예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과 나는 P 교수의 집을 똑같이 빌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느 집단에 소속되었는지에 대한 경험이 그들을 구분한다. 장 선생은 집을 가지고 싶어 지자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고 결탁해 문서를 위조해 소송을 걸 준비를 한다. 장 선생은 마을 사람과 똑같이 다수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자폐아인 딸로 인하여 이미 소수자의 위치에 서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고 제안을 거절한다.

  이러한 선택으로 인하여 폭우가 내릴 때 나는 도아로 인해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오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은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만약 장 선생이 소송으로 그 집의 소유권을 얻었다면 그는 결국 집을 얻었으나 창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는 잃어버리게 된 것이 된다. 



동아 


세상이 보는 불행이 실제로도 불행한 것일까.”     


  동아는 불행이자 행운인 존재이다. 세상은 동아를 나와 부인의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와 부인은 동아를 통해 큰 기쁨을 누리고 겸손해졌으며 불행한 이들을 민감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행운이라 말한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나의 주요 행위는 모두 동아로 인해 일어난다. 동아의 고함으로 이사를 생각하고, 동아의 고함으로 마을을 떠난다.

  동아의 고함은 소설 안에서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의 역할을 한다. 동아는 자폐증 환자인 자신을 배척하는 도시 사람들의 시선에 위험을 느끼고 고함을 통해 자신의 이를 가족들에게 전한다. 이는 일상 속에서 정신병 환자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혐오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러한 동아의 사이렌으로 인해 나와 동아는 S 계곡 마을로 이사 온다.

  마을은 외진 곳에 있어 사람이 별로 없으나, 이곳 사람들 또한 동아를 탐탁지 않게 보기는 똑같다. 마을 사람들이 왔다 간 날 동아는 또 고함을 지른다. 기존 도시가 아닌 시골마을인 S 계곡은 법이 법같이 않다는 공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불법으로 집을 개조하고 장 선생과 결탁하여 거짓된 증언으로 문서를 만든다. 이러한 특성은 집단으로 행해지는 개인에 대한 폭력을 단순한 법과 법칙을 떠나 도덕과 감정적인 시선에서 보게 만든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P 교수를 매도하고 험담하며 장 선생과의 결탁을 합리화하는 모습은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이유가 있다며 합리화하는 사회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동아는 마을을 떠날 때 평소와는 다르게 고함을 친다. 차 키를 챙기고 ‘아빠’라는 말도 하며 소리를 지른다. 이전과는 달리 위험이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동아와 나가 떠나자마자 마을은 폭우로 침수가 된다. 이는 창세기 노아의 방주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동아의 고함을 신경 쓰던 나는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동아네 가족을 따돌리고 탐탁지 않게 보던 마을 사람들은 나가 떠나며 전화를 여러 번 걸었음에도 받지 않았고, 결국 침수로 집과 풍경, 심지어 목숨도 잃어버린다. 이는 사회가 소수를 배척하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의 한 단편적인 예 이자 아무리 다수여야 봤자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러나를 덧붙여야 한다. 


  소설 안에는 ‘나’는 관찰하는 태도를 취한다. 자신도 관찰의 대상으로 ‘나’는 자신도 관찰하고 분석한다. 이는 그의 과거 직업을 잘 드러내는 동시에 소설 안 묘사들을 낯설게 느껴지게 한다. 말 그대로 ‘나’의 태도와 생각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 안 마땅한 사유나 관계성이 비어도 이는 ‘나’가 이해하면 타당한 일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서술을 통해 읽는 이가 마을과 ‘나’를, 즉 사회와 읽는 이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다시 바라보게 한다. 


  소설 안에는 특이한 문장 구조가 여러 번 보인다. ‘나’가 자신의 의견 혹은 생각을 말하고 그 뒤에 ‘그러나’로 반대되거나 상이한 내용의 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나’처럼 우리의 주장과 생각 뒤에 ‘그러나’를 덧붙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말할지언정 그 반대편에 어느 의견이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소수라는 자리는 상대적이기에 내가 소수가 되었을 때에도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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