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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용 May 16. 2024

[홍시생각 15] 을씨년스런 날 조명하 의사를 떠올리다

잊혀져만 가는 의열사들…후손된 도리 아니다

오늘 15일은 석가탄신일이다. 이상스럽게도 요즘은 공휴일이면 비가 온다. 

오늘은 찬 바람에 비까지 흩날린다. 을씨년스럽다. 


'을씨년스럽다'는 1905년(을사년) 을사늑약 체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을사늑약 후 조선은 모든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 신세로 전락했다. 이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을사년스럽다'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을씨년스럽다'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날 집안에서 뒹굴다가 한 기사에 눈길이 꽂혔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96주년 기념행사가 타이완에서 열렸다는 기사였다.  

조명하 의사가 누구지?

왜 대만에서 기념행사를 했나?

 


(타이베이=연합뉴스) 김철문 통신원 =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 대장 척살에 나선 조명하(1905∼1928) 의사의 '타이중 의거' 96주년 기념행사가 11일 대만에서 열렸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교수는 이날 타이중시 의거 현장에서 교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조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을 바른 단도를 들고 타이중시 도심 도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지나던 구니노미야 대장을 급습했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스물셋 나이로 순국했다.(하략)

https://www.yna.co.kr/view/AKR20240511026000009?section=search





1928년 5월 14일.

타이완 타이중(臺中.台中)시 타이중 주립 도서관 앞.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가 탄 차가 도서관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려는 순간 군중 사이에 서 있던 한 청년(조명하)이 단도를 빼 들고 날쌔게 무개차 뒤쪽에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명하는 구니노미야를 직접 찌르지 못하자 단도를 그에게 던졌다. 

단도는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치며 상처를 냈고, 운전사의 등에 맞았다.

조명하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군중들에게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같은해 7월 18일 조명하에 대한 공판이 타이베이 고등법원에서 방청을 금지한 상태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재판부는 형법 제75조 ‘황족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위해를 가하려고 한 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라는 조항에 의해 조명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조명하는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때 그는 23세 청년이었다. 


황해도 군청 서기로 안락한 생활 보장받아

그는 1905년, 그 을씨년스러웠던 해에 황해도 풍천군(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결혼 이듬해인 1926년(21살) 이듬해인 1926년에는 군청 서기 임용 시험에 합격하여 3월부터 황해도 신천군청에서 근무하였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군청 서기라는 직업을 가진 조명하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같은 황해도 출신인 김구와 노백린 등을 떠올리며 독립운동에 나설 뜻을 가슴 속에 품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4월 26일 순종 황제가 사망했고 6·10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목격하며 조명하는 독립운동에 직접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신천군청 서기직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집을 떠났다. 

이때 부인 오금전은 아들(조혁래 趙赫來)을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중이었다. 조명하는 어머니와 함께 아내와 아들을 보러 가던 중 갑자기 “큰 볼 일이 있어 멀리 떠나야겠습니다”라며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어머니가 “여기까지 왔으니 처자를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극구 말렸으나, 조명하는 이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다고 한다.   


일본 유학 뒤 타이완으로 

일본에 도착한 조명하는 오사카에 머물렀다. 조명하는 낮에는 메리야스 공장과 상점 등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오사카상공전문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하였다. 일도 고되었으나 더욱 힘들었던 것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결국 일본에서의 생활은 조국 독립에 대한 조명하의 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다.

      

조명하는 일본에서 다시 타이완(대만, 臺灣)으로 건너갔다. 타이완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아 식민지로 삼아 통치하던 중이었으니, 우리나라와 같은 처지였다. 타이완은 만주나 연해주에 비해 이주한 한인들의 수가 적었다. 이는 육로로 연결된 만주나 연해주와 달리 배를 통해 이동해야 했기에 이주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 대만에는 수백여 명의 한인들이 머물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명하가 타이완으로 향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당시 타이완은 일본의 영토로서 비교적 여행이 자유로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타이완을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들어갈 생각이 아니었나 하고 추측하고 있다.


일본 육군대장 타이완에 왜 왔나

당시 일본은 중국 본토 침략을 엿보고 있었다. 이에 타이완은 중국 침략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많은 일본군 병력이 타이완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는 1928년 5월 11일 중국 산둥반도의 지난(齊南)을 점령하여 중국 본토 침략에 나설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어서 5월 14일에는 일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를 특별검열사로 타이완에 파견하여 타이완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게 하였다.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는 일본 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었으며 자신 또한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당시 일본의 최고위층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명하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고 구체적인 살해 계획을 짰다.      

[출처] 기일:기억의 날(당신을 기억합니다) 84편 _ 일본 육군대장 구니노미야 습격 의거 조명하|작성자 국립서울현충원


살아서도, 죽어서도 편치 못하다

조명하 의사는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그의 유해는 현재 국립 서울현충원 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44구역에 안장돼 있다. 

그러나 그의 묘역 주변에는 일제에 빌붙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민족반역자, 부일세력자들이 묻혀 있다.


1988년에는 의거 6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공원 입구에 조명하 의사 동상이 세워졌다. 

그런데, 그 곁에는 김성수, 조병옥 동상이 들어서 있다. 

김성수는 부일 민족반역행위자이고, 조병옥은 제주 4·3사건 당시 양민학살을 지휘한 자이다. 

어떻게 이런 자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을까.  

누가 이런 조합을 기획했을까.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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