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5일자 '신한민보' 사설을 다시 들춰본다
"1950년 6월 25일 모두가 잠든 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전쟁이 끝난 지, 정확하게는 전쟁이 중지된 지 71년이 다 돼가는데도 '동족상잔을 일으킨 북한(이하 조선)'에 대한 적개심은 식을 줄 모른다.
윤석열 정권 들어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조선이 일으켰나?
한국 사회에서 이 의문은 제기 자체가 금기시돼 왔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한다.
그것이 '기레기' 오명을 씻어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995년 말 한국기자협회(당시 회장 안재휘)는 해방 50주년을 맞아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1945~1995>를 펴냈다. 남영진 전 한국기자협회장이 편찬위원장을 맡았고 기자 1백여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이 책은 A4용지 크기의 1천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안 회장은 발간사에서 "우리는 이 책에서 지난날 잘못 쓴 기사들을 상당부분 바로잡고, 못다쓴 이야기들을 보탬으로써 독재의 총칼 아래 제 구실을 하지 못했던 언론의 초라한 자화상을 치열하게 반성하고자 한다"면서 "아무리 재갈을 물리고 손을 묶어도 결국은 진실을 말하고 양심을 써내고야 만다는 참 기자의 끈질긴 근성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발간 취지를 밝혔다.
기자 경력 10년이 안 된 초년 시절이었지만 과분하게도 필진으로 참여하게 됐다. <"38선 베고 쓰러질지언정 분단은 안 된다",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이라는 제목의 한 장(章)을 맡았다.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쓰자면, 해방공간에서 벌어졌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관련 기사를 토대로 글을 써야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 옛날 기사를 찾을 수 있을지 시작부터 난감했다.
프레스센터 12층 자료실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던 1940년대 신문이 나의 구세주였다. 그 옛날 신문을 필름 처리를 해서 보관할 생각을 누가 했는지 그에게 진정 고마움을 느꼈다. 필름을 돌려가며 관련 기사를 찾고, 기사 속에서 김구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등을 만나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 만난 기사 중 하나가 1948년 8월 5일자 신한민보(新韓民報) 사설 '이북의 위원장과 이남의 대통령'이었다.
신한민보는 우파 중도세력으로 분류되는 안재홍 계열에서 발간한 신문으로, 이 사설이 나올 때쯤에는 좌우합작, 남북합작이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는 게 예정된 일로 보일 때였다.
아래는 사설 일부이다.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116쪽에 실었던 것을 재인용했다. 이 사설에서 '조선'은 '코리아'(Korea)를 뜻한다.
이북의 위원장과 이남의 대통령
옛말에 이르기를 한 하늘에 두 날이 없고 한 나라에는 두 왕이 없다고 하였거늘 오늘 조선에는 땅 절반을 잘라 소위 38선이라 부당한 줄을 그어놓고 두 나라를 형성한 까닭에 이북에는 아라사 공제하의 인민공화국이 있고 이남에는 미국 공제하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있게 됐다. 조선이 외국세력하에 나뉘어 두 원수가 있게 된 것은…4천년 역사상에 없던 일이요, 카이로선언의 실신이며 모스코협정의 배약이며 더욱 3천만 민족의 지원이 아니니 이를 장차 어찌하랴. 오늘 우리는 이로 인하여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날 것을 저어한다.
합동통신사 해외신문의 7월 27일 평론에 의하면 조선 내전은 형세가 면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으니 … 조선의 내전이 일어난다면 이북의 공산군은 김일성 장군이 지휘할 터이며 이남의 민주군은 이승만 박사가 호령할 터인가.
가령 남북군대가 동족의 원수가 되어 서로 접촉한다면 그 피는 누구의 피를 흘릴 것이고 그 공은 누구에게 돌리고 그 죄는 누구에게 지울 터인가. 또 남편을 부르짖는 과부와 아들을, 우는 부모를 그 누구가 장차 위로하랴. 이북의 위원장이 이남에 와서 위로하며 이남의 대통령이 이북에 가서 위로하랴.
최근 보도에 의하면 8월 25일 북조선의 총선거를 거행한 후 아라사 군대는 철퇴하고 조선 공산군으로 하여금 남조선까지 통일할 예정이요, 미군도 또한 아라사와 같은 조치를 취하여 8월 15일 일본투항 기념일로부터 철퇴를 개시하고 자위능력을 가질 조선 민주군을 훈련할 터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여기서 짐작하는 것은 미국 아라사 양방이 조선에서 직접 충돌을 원치 아니하여 조선 남북의 내전을 만들어주는 것이요, 한 나라에 두 원수가 있게 된 것도 또한 여기서 동기가 된 것이다.
애오라지 묻나니 이북의 위원장과 이남의 대통령은 이때를 당하여 그 무슨 생각을 가졌으며 미국 아라사 양국은 조선의 운명을 가져가 장차 어디에 둘 터인가.
1948년 8월 5일이면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10개월 전쯤이다.
이때 이미 동족상잔의 내전을 '저어'하면서, 동족이 원수가 돼 피를 흘릴 수 있다는 끔찍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 동족상잔은 미국과 아라사(소련) 양방이 "조선에서 직접 충돌을 원치 아니하여 조선 남북의 내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동족상잔을 예고한 것은 신한민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좌우합작 남북협상파가 하나같이 동족간의 피바람을 예고했던 것은 그들이 선지자적인 예지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상황에서도 눈에 뻔히 보이는 명약관화한 사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116쪽)
신한민보 사설이 나온 지 열흘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 달쯤 뒤인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됐다.
굳이 '정부'와 '공화국'에 홑따옴표를 붙인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정통사관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1919년 그때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는지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는지 잘 모르겠다.)
3·1운동 뒤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임시정부가 해방 뒤 '대한민국 정부'로 공식화됐다.
그러니 대한민국 '건국' 시점은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고,
1948년 8월 15일은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식정부로 바뀐 날이다.
(※ '국가', '정부', '정권'은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추상적 '국가'의 구체화된 형태가 '정부'이고, 그 정부를 일정 기간 맡아 운영하는 게 '정권'이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 윤석열 정권 등으로 써야 맞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정통성을 갖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렇지 않다고 이른바 정통사학계는 주장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대한민국 정통 사학계의 공식 견해이다.
나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기에 '그런가보다'하고 그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 국민의힘 족속들은 그 '정통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엉뚱한 소리를 내고 있다.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각기 창건한 국가라는 공통점을 갖게 된다. 정통성 우위 논쟁이 무의미해진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어서가 아니라, 말이 되는 일관된 논리를 보고 싶다.
민족역사의 정통성을 누가 잇고 있느냐는 측면에서 한국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에 걸맞는 논리를 펴야한다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고 한다면 1948년 9월 9일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일이라는 주장에 하등 '우위성'을 내세울 것이 없다.
내가 보는 건국일은 이렇다.
대한민국은 1919년 3월 1일 건국을 선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한반도가 일제 통치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 다음달인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8년 9월 9일 건국했다.
우리 민족이 이북 땅에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운 것이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영토조항에서 이북 땅을 자기 영토로 규정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헌헌법 또한 수도를 '서울'로 정하고 '국토 완정'을 명기했다.
한국, 조선 양쪽 모두 한반도 전체가 우리 국가 영토라고 헌법에 명기한 것이다.
(※조선 헌법에서는 수도 '서울' 조항, 국토 완정 조항이 사라졌다. '국토 완정', '평정'이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대에 재등장한 게 주목된다.)
이에따라 양국은 공공연히 무력통일 불사 방침까지 천명했다.
38도선 부근에서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크고작은 무력 충돌이 잇따랐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이 조선 영내로, 조선이 한국 영내로 침입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성 송악산 전투는 그 한 사례이다(참고 https://brunch.co.kr/@8e4cf4a5799048c/13) .
신한민보 사설이 나온 지 1년이 채 안 돼 남북협상파, 민족자주세력의 구심점이었던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
반공을 내세운 외세추종파가 국군 장교 안두희를 사주해 저지른 짓이었다.
김구 선생 등 민족자주파가 한국(이남)에서 제거됨으로써 조선(이북)과의 대화 협상은 단절됐다.
신한민보 사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화 협상의 단절에 이은 무력충돌은 예정된 순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측은 무력사용도 불사하는 흡수통일을 공공연히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6·25전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묘하게도, 김구 선생이 서거(1949.6.26.)한 지 딱 1년 뒤였다.
그런데 조선에 동족상잔의 책임을 묻는다?
'한국'과 '조선' 두 권투선수가 사각 링에 올랐다.
서로 잽을 날리며 탐색전을 펼치다가 '조선'이 강력한 어퍼컷을 날렸다.
'한국'은 그로기 일보 직전에 몰렸다.
급기야 '한국'측에서는 링 위로 응원군을 불러들였다.
1 대 17로 싸우는, 말도 안되는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한국, 조선은 출범 초기부터 무력사용도 불사하는 흡수통일 정책을 채택했다.
둘이 싸우기로 서로 '약정'을 하고 링에 오르는 권투시합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그런데, '한국' 선수가 하는 짓이 가관이다.
싸우자고 링에 올랐는데 "왜 난데없이 주먹을 날리느냐"고 '조선'에게 욕을 퍼붓는다.
멍청히 서 있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으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 상대편을 욕할 일이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6·25전쟁을 일으켰다며 진실을 왜곡하고,
민족상잔의 책임을 오롯이 조선한테 전가하는 한국의 태도는
야비하고 불량하다.
6·25전쟁 74주년, 김구 선생 75주기를 맞은 날, 홍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