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인혁당 사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9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 다녀왔다.
4·9통일열사 49주기 추모제에 참석했다.
현직에 있을 때 인혁당 사건 관련 기사 한 줄 쓴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마음 한 켠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부채감이 나를 그 자리로 이끌었다.
예상했던 대로 나이드신 분들이 많이 보였다.
지인과 가족 친지들이 대부분이었고 나같은 무연고자는 몇 안 되는 듯했다.
추모제가 거행된 곳이 성당인 탓도 있었겠지만
분위기는 착 가라앉다 못해
마치 심연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느껴서일까.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알아가면 갈수록
도대체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절망감만 커진다.
죄도 없는 자기 나라 국민을
고문하고, 살해하고,
연좌제로 가족들 피눈물 흘리게 만들고,
배상금이라고 몇 푼 쥐어준 걸
다시 빼앗아 가고.
이게 나라가 할 짓인가.
이게 나라냐.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07년 1월 인혁당 사형수 8명에 대해 무죄 선고를 확정했다.
그해 8월 사형수 피해 가족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사형수 아닌 무기수·유기수 피해 가족들도 2008년부터 차례로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노무현 정권 때 있은 일이다.
2009년 8월에는 관련자 77명이 손해배상금 65%(491억여원)를 가지급받았다. 이 돈으로 빚 갚고, '4·9통일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사회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시작됐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이자가 너무 많이 계산됐다’며 이자 지급 기준일을 손해배상 재판의 2심 변론종결일로 바꿔버렸다. 그 결과 손해배상금은 반토막이 났다. 77명에게 가지급한 491억여원 중 210억원을 되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대법원의 논리는 이랬다. 사건이 벌어진 1974년으로부터 ‘장시간의 세월’이 흘러 통화 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고, 이 때문에 예외적으로 지연 이자 기산점을 변론 종결일부터 잡아 계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장기간의 세월’과 ‘상당한 변동’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야말로 ‘두 가지 판결’이다. 사형수 피해 가족들은 문제없이 지연이자를 받았지만, 무기수·유기수 피해 가족들은 지연이자가 삭제됐다(한겨레신문 2017.9.2.).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국가정보원(국정원)은 한술 더 떴다.
이른바 인혁당 사건 가해자인 중앙정보부(중정)의 후신 국정원이 부당하게 국고를 털린 피해자인 양 행세하고 나섰다.
국정원은 2013년 7월 무기수·유기수 피해자 77명에 대해 가족별로 동시에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다.
국정원은 대법원의 지연 이자 기산점 변경에 따라 30여년치 이자를 반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환 지연 기간의 연체이자까지 갚으라고 요구했다. 연체 이자율은 무려 20%나 됐다.
법원은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30명에 가까운 피해자들은 생활고 등으로 반환을 할 수 없었다. 일부 피해자는 국정원의 조치를 취소해 줄 것을 요구하는 재판을 걸었지만 법원은 이 때도 국정원 손을 들어줬다.
채권자의 추심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재산이 있다면 살고 있는 집이든, 심지어는 선산 땅이든 압류를 하고 경매에 붙였다. 못 내겠다며 맞소송을 벌이는 동안 연체이자는 눈덩이처럼 커져만갔다. 당연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례도 생겨났다. 반환금을 내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고 심지어 어떤 피해자는 홧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애시당초 중정이 사건 조작을 하지 않았으면 사법살인이 일어날 리가 없다. 무기수, 유기수 피해자도 없었을 것이고 수십년이 지나 재심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배상금을 줬다가 빼앗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지었으면 그에 따라 후속절차를 밟으면 그만이다.
국가의 제1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고,
공권력 때문에 빚어진 억울함은 공권력이 나서서 한 점 남김없이 깨끗이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전기고문, 물고문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돈(錢)고문이냐는 빗발치는 원성이 들리지 않는가.
지난 2022년 6월 법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제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가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이의소송에 대해 법원이 제시한 화해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법무부는 이날 한동훈 법무장관 지시로 차관 주재 하에 법무부(승인청), 서울고검(지휘청), 국정원(소송수행청) 관계자가 참여하는 회의를 개최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법무부는 “예측할 수 없었던 대법원 판례 변경으로 초과지급된 국가배상금 원금 외에 이자까지 반환토록 하는 것은 국가배상의 취지, 정의 관념과 상식에 비추어 가혹할 수 있다”며 “국가채권관리법상 채무자의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부당이득반환의 경우 원금 상당액을 변제하면 이자를 면제하는 것이 가능한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 조치로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풀리겠는가마는 정부 당국이 해결하자고 하면 방도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피해자들의 고통을 듣기만 했을 뿐 실제 해결책은 내놓지 않았다. 그저 삼권분립 원칙때문에 사법부의 결정에 행정부가 간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한동훈 법무부의 사례에서 보듯이, 뜻을 갖고 찾아보면 더 괜찮은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조작해 사법살인까지 저지른 공권력이 당연히 결자해지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