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공권력'에 책임을 물을 생각도 하지않는 이상한 나라
1975년 4월 9일.
49년 전, 거의 반세기 전에
이른바 인혁당(人革黨) 사건으로 8명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서도원(52.무직.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51.삼화토건 회장)
하재완(43.양조장 경영)
이수병(37.삼락일어학원 강사)
김용원(39.경기여고 교사홍선(45.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송상진(46.양봉업)
여정남(31.무직.전 경북대 학생회장)
한 자 한 자 이름을 쪼아박은 것은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고픈 나의 작은 바람때문이다.
굳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라고 칭한 것은 인혁당, 즉 인민혁명당이 실체도 없는 가공 조직이기 때문이다.
가공의 조직을 내세워 국가변란 획책 사건이라며 재판놀음을 하고, 꼭두각시 대법관들이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사형 판결을 확정한 뒤 다음날 9일 새벽 형을 집행했다.
18시간만의 초고속 집행이었다.
형 집행 뒤에도 상상도 못할 만행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시신만 가족에게 인도했을 뿐 나머지는 강제로 빼앗아 벽제 화장터에서 소각해버렸다.
당시 사형을 확정했던 대법원 재판에 누가 참여했나.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다.
이일규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가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소신판결로 법조계 안밖에서 신망이 깊었던, 그래서 '통영 대꼬챙이' 별명이 붙었던 바로 그 이일규 전 대법원장(2007년 작고)이다.
국제엠네스티는 4월 10일에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도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사법 살인’이라며,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964년 8월 제1차 인혁당 사건, 1974년 4월 제2차 인혁당 사건이다.
제1차 사건은 1964년 8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됐다.
당시 정보부장은 '멧돼지' 김형욱이었다.
특기할 만한 건, 1차 사건 수사 당시 검사들의 항명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서울지검 공안부의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 김병금·장원찬 검사 등은 약 20일간의 수사 끝에 불기소 방침을 세웠다.
오죽 말이 안 되는 억지 조작 사건이었으면 수사 검사들이 항명까지 했을까.
검찰은 서울고검 한옥신 검사 담당으로 재수사에 나섰다. 한 검사는 수사결과 간첩들과 접선했다는 확증은 잡지 못했으나 북한의 평화통일론을 강령으로 삼는 등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한 혐의는 있다고 밝히고, 14명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하고 나머지 12명에 대해서는 공소장을 변경, 국가보안법 대신 반공법을 적용시켰다고 발표했다.(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한국사사전편찬회)
제2차 사건은 1차 사건 10년 뒤의 일이다.
이 때는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들판에 불붙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민청학련의 배후 조직으로 '인혁당 재건위'와 '일본 조총련'을 끌어들였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1차 인혁당사건 당시 검찰총장)은 1974년 4월 25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며 “이들은 정부 전복 후 공산계열의 노농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고 주장했다.
2002년 두 차례의 인혁당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이 시작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하고,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하게 되었다.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은 "인혁당 사건이 박정희 대통령의 자의적 요구에 의해 미리 수사방향이 결정돼 집행된 것"이라는 자체조사결과를 발표했으며, 이 조사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되었음이 밝혀졌다.
2006년,'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수사당국의 가혹한 고문에 의해 조작됐고 이 사건 관련자들의 행위가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판단돼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같은 해 유족들은 국가대상 손해배상청수 소송에서 총 637억여원의 배상판결을 받아내서 승소하였다. 법무부는 이에 대해 "국가의 잘못이 있고 유족들의 심적 고통이 크다"고 하여 항소를 포기했다.
민복기 전 대법원장,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이용택 전 중앙정보부 6국장.
인혁당 조작 3인방으로 알려진 자들이다. 특히 이용택은 1차 사건에서는 수사요원, 2차 사건에서는 수사를 지휘하는 중정 6국장이었다.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작업이 벌어지자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냐'며 인터뷰에 나서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16619?sid=102).
민복기, 신직수는 사망했고, 이용택(1930년생)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용택은 중정 퇴직 후 정치인으로 변신, 제11·1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놀라운 변신술이다.
인혁당 조작 수사, 고문, 사법살인에 가담한 판사, 검사, 경찰관, 중정요원들은 '3인방' 외에도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이들 중 책임을 인정한 者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 누구도 이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요즈음 '돈(錢) 고문'을 당하고 있다.
배상금이 과다 지급됐으므로 다시 토해 내라는 판결 때문이다.
첫번째 판결에 따라 받은 돈으로 피해자들은 '빚잔치'를 이미 끝내버렸다.
그런데 두번째 판결에 따라 다시 토해 놓으라며 재산 가압류를 한다, 압류 딱지를 붙인다 들들 볶으니
이게 고문 아니면 뭐인가.
신체적 고문만큼이나 악랄하고 어찌보면 그보다 더 교활한 게 '돈 고문' 아닐까.
과거를 잊은 자에게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지금 가해지고 있는 '돈 고문'은 인혁당 사건이 잊어버려도 되는 과거지사가 아니라는 역사의 경고이다.
사법살인까지 저지른 자들의 책임 소재를 가리고,
지금이라도 응당하게 징치를 해야한다.
그것이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는 걸 막는 확실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