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에서 어떤 개그우먼이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 개그우먼이 아이를 어찌나 극진히 사랑하고 애지중지 키우는지, 그 모습이 정말 애처롭고도 아름다워 눈길이 갔다.
그 모습을 함께 보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저 사람이 저토록 아이를 정성들여 사랑으로 키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는 너거 클 때 그리 못해 준게 너무 미안하다.”
팔순 노인이 되신 엄마 입에서 '사랑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는 엄마를 안심시켜드려야 할 것 같아서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땐 다들 살기 힘들었잖아. 엄마만 그런건 아니었지.”
사랑하지 않아서 애지중지 안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했던 시절이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엄마한테 나는 깨물어도 안아픈 손가락이긴 했던 것 같아."
“…?”
엄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치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사 와 작은 다락방이 달린 단칸방에 아이 다섯과 함께 일곱식구가 옹기종기 살았다. 두 분은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아오셨고,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터라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이나 공장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 버티며 다섯 자녀를 키워내야 했다.
당시 부산은 신발 산업의 호황기였고, 크고 작은 신발공장이 많았다. 엄마는 어렵지 않게 공장에 취직하셨다.
그 시절에는 학교 급식도 없었다. 아이들은 도시락을 두 개씩 싸 가야 했고, 아버지와 엄마의 도시락까지 합치면 하루에 열 개. 엄마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공장 점심시간은 고작 30분. 엄마는 밥을 허겁지겁 삼키고는 다음날 도시락 반찬을 위해 근처 오뎅 공장으로 달려가 파지를 사 오거나,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 오셨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연탄불과 곤로 앞에 서서 저녁을 지었고, 세탁기도 없는 시절이라 손으로 빨래를 해야 했다.
그런 하루가 날마다 이어졌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알뜰히 살뜰히 챙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렇게 억척스럽게 버티며 살아내셨을까 싶다. 그저 우리를 무사히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가운데 ‘사랑을 덜 받았다’고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나는 2남3녀 중 넷째다. 맏이는 딸이고, 이어서 아들 둘, 그리고 딸 둘.. 그 가운데 내가 넷째였고, 딸들 중에서는 둘째였다.
첫째인 언니는 공부를 매우 잘했지만 입맛이 까다롭고 성격이 매우 예민했다. 엄마가 늘 조심스레 맞춰주며 챙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큰오빠는 장남이라 귀한 대접이 당연했고, 둘째 오빠는 착하고 성실한 아들이어서 항상 나와 비교되며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늦둥이인 막내는 말할 것도 없이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그렇게 나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은 저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낀 나는 늘 그 관심 밖에 있었다.
아직 초등학생 어린아이였는데도, 엄마가 야근하고 돌아왔을 때 설거지를 안 해놨다고 혼난 날이 많았다. 고등학생인 언니에게는 아무 말도 안하고 나만 혼났다. 교회에 자주 나간다고 "맨날 교회에서 살 거면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쫓겨나기도 했다. 늘 나만 혼났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은 나만 싫어한다고 믿었다.
언니와 큰오빠는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을 고려해 실업계로 진학해서 일찍 취직을 했다. 작은오빠는 인문계고를 다녔지만 대입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내가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전액 장학금으로.
부모님께 알리면 얼마나 좋아할까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갔다. 그런데 마침 집에 와 있던 고모가 그 얘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아들이 그래 됐으면 좋았을낀데..”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 침묵이 곧 동의처럼 들렸다.
그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칭찬 받을 줄 알았다. 기뻐해 주실거라 믿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아쉬움 섞인 말이었다. 내가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건가? 오빠가 대학에 못간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런 말을 한 고모가 미웠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엄마의 반응이 더 서러워서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평생 나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부모님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마음속 서운함을 제대로 직면하거나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왔고, 나중에는 그런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불현듯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고백 앞에서 , 묻어둔 그 서운함이 불쑥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짧은 침묵에 이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나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 잘 몰라서 그랬다.”
엄마에게 상처를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 정도도 부모를 이해못하는 미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서 눌러두고 있었지만 사실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 남겨졌던 상처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물지 않았었나 보다.
맞다, 엄마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셨다. 여섯 살에 엄마의 엄마를 여의고, 일곱 살때부터 남자들만 있는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제대로 못한다고 외할아버지한테 혼나기 일쑤였다고 했다. 남들 다 입는 교복 한번 못입어본 것을 평생의 아쉬움으로 품고 사셨고, 결혼해서도 무심한 남편에게 시집간 바람에 사랑받는다는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사셨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줄 안다고 하지 않던가. 엄마도 사랑 못받아서 그랬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할머니가 되어서 그 부족함을 사과하신 것이다. 노인이 되면 고집이 세어지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들 한다. "엄만 왜 날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어?"라고 불평을 했을 때, 사과는 커녕 "나도 그래 살았다. 다 그래 산다. 먹고 살기 힘든 판국에 무슨 사랑이고?"하실 법도 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러지 않으셨다. 나는 알았다. 엄마가 전하는 사과에는 순수한 진심이 가득했다.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과다.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던 엄마에게 그 '사랑의 마음'이 어디서 생겼을까? 그건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엄마를 꼭 안아드렸다.
엄마도 나를 꼭 안아주셨다.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