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볼 그까짓 것, 흥칫뽕!
_ 게이트볼 그까짓 것, 흥칫뽕!
주도권, 선택권이라 하면 바로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박여사는 딸과 사뭇 다르게 운동 매니아입니다. 그분과의 여행 일정 잡을 때 제일 먼저 고려되는 것 중 하나가 박여사 운동 일정입니다. 어느 이른 봄, 박여사의 고향인 남도 한바퀴를 할 예정이었지만 미뤄졌던 것도 배드민턴 시합일 때문이었지요.
박여사는 골프, 수영, 탁구, 테니스 등 각종 운동을 섭렵했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오래 즐긴 종목은 배드민턴입니다. 생활체육 A조(제일 높은 등급)로 각종 상도 많이 타셨고, 동호회 회장도 지내셨지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 인공관절수술까지 하셨지만, 운동하느라 관절을 너무 많이 쓰셨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비의료인인 나의 사견입니다만 만약 내가 같은 수술을 받게 된다면 아마 정반대로 운동 부족으로 인한 근육 부족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좌우간 인공관절수술로 박여사의 운동 인생, 그중에서도 배드민턴과의 인연은 영영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셨을 겁니다. 배드민턴은 상당한 강도의 운동이고,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은 노인에게 권장할만한 종목은 아니지요.
걷기운동이나 열심히 해야겠다셨고 수영을 다시 시작해볼까도 하셨지만, 차일피일하던 차에 이사하신 아파트 주변에 전천후 게이트볼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되어, 그렇지 저게 딱이다 했습니다.
운동으로 단련된 분이니 게이트볼 정도(?)는 금방 배우실 것 같았고, 연세에 딱 맞는 운동이라 생각해 가족 모두 강권하다시피 했습니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동호회 가입까지 하셨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노인맞춤운동’이라 생각했던 게이트볼 동호회에서 박여사의 나이가 거의 제일 많았고, 게다가 초보였던 겁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초보자를 위한 코치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아 운동이라면 자신이 있던 분이 생각보다 적응을 잘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우호적인 분들도 계셨지만, 텃세의 느낌도 살짝 받으셨던 듯요.
인생 마지막 운동이라 생각하고 나름 여러 면으로 적응 노력을 하시는 듯했지만, 삐걱대는 느낌이 계속 있었습니다. 몸은 마음 같지 않고, 나이 많은 초보자로서 위축되는 면도 없지 않으셨나 봅니다.
어느 날! 오래전 알고 지내던 배드민턴 동호회 관계자가 근처에 산다는 얘길 들으셨다며 그분을 찾아보길 원하셨습니다.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서 초보자들 연습 정도는 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배드민턴을 치면서 뛰지 않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 말리고 싶었지만, 일단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요즘 내가 박여사에게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박여사, 하고 싶은 말 있음 하시고, 하고 싶은 일 있으면 하세요’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더구나 팔순이 넘은 나이에 모든 걸 원하는 대로 하시길 바랐습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고, 뭐 해결이 안 돼도 그만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무너지기야 할까요.
‘탐정놀이’가 시작됐습니다. 일단! 주변 배드민턴 동호회를 무작정 찾아갔지요. 거기서 ‘그분’을 만나진 못했는데, 그분을 알 것 같은 분을 알고 있다는 여자분을 만났습니다. 다시 그분을 알고 있을 것 같다던 분을 찾아 배드민턴용품점을 찾아갔습니다. 오호라, 그곳 대표님이 정말 엄마가 찾던 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호형호제하는 사이시더라고요.
그런데 어쩌나요, 그분, 다른 데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 가게에서 뜻하지 않은 반가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노인들만 모인 배드민턴 동호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박여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더군요. 아니, 세상에 이런. 언제 어디서 귀인을 만날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자 그럼 이제 그곳에 가볼 차례입니다. 정말 한때 배드민턴 좀 쳤다는 노인들이 다 모여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동호회 이름이 ‘장수반’입니다. 노인들이, 그중 인공관절 수술한 분들도 다수, 무리할 일 없이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즐기며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으셨습니다. 박여사가 무릎 수술 얘길 꺼내며 배드민턴 치기가 겁난다 하니 같은 수술을 한 분들이 여기저기서 아무 문제 없다는 ‘간증’을 합니다.
어떻게 됐냐고요? 처음 잠깐은 서브도 제대로 넣지 못해 당황해하던 박여사는 배드민턴 동호회에 잘, 아주 잘 나가고 있으시고, 얼마 전엔 노인대회까지 나가, A조가 아닌 C조이긴 하지만, 준우승을 하셨답니다. 우승이 아닌 준우승을 하신 이유는, 본인보다 잘 치는 파트너가 중간에 막걸리를 한잔 드신 탓이라 하시네요. 확인할 길은 없지만 박여사가 그렇다니 그런 거지요.(그 다음 번엔 우승도 하셨습니다!)
게이트볼은요? 회비도 다 내셨고, 그 시설은 시에서 만든 것이니 언제라도 가시면 됩니다. 가기 싫으면 안 가시면 되지요. 배드민턴 가시면 되니까요.
박여사의 게이트볼 동호회 ‘사태’를 지켜보며 몇 가지 다시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이와 관계없이 본인이 삶의 주도권, 선택권을 놓치지 않는 것이 자존감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겁니다. 이제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는 게이트볼이나 파크골프 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에 안 들어도 참고 게이트볼을 치러 갔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뭐 안쳐도 그만인 상황입니다.
배드민턴을 치러 다니시며 박여사는 다시 물 만난 고기가 되었습니다. 게이트볼요? 아니면 말고, 흥칫뽕이 된 거죠. 비싼 스틱 산 것이 살짝 아깝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게 뭐 대수입니까. 박여사의 자존감 지수가 +10 되었는데요.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나름 노력하고 있다 자부하지만, 아차 싶던 일도 있었습니다. 이제 박여사는 배드민턴을 칠 수 없다고 너무 쉽게 단정했던 것을 깊이 반성했습니다. 무릎 수술 정도 한 게 뭐 대수라고 ‘자신들의 리그’를 만들어 활기차게 사는 분들이 그리 많은데 말입니다. 내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거나 아닌 것은 아닐 가능성은 이렇게 거의 늘 존재합니다.
그리고 뭐라도 하려면 뭐라도 해야 합니다! 배드민턴 동호회 같이 하던 지인을 찾으려다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운동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발견하게 될지 누가 알았냐 말입니다. 어쩌다 처음 만난 운동용품 주인장이 주신 정보가 박여사의 일상을 이전보다 훨씬 활기차게 바꿔 놓았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뭐라도 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꾸지 않으면서 뭔가 되거나 바뀌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입니다.
박여사의 연장된 운동인생을 응원합니다!
+ 박여사님께: 뭔가 쉽게 단정하는 일은 조심해야지 늘 다짐하는데도, 당신의 운동인생을 자식 마음대로 판단하고 재단했던 것 같아 그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딸은 왜 이런 건 박여사를 닮지 않아, 평생 운동을 ‘의무방어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다행히 걷는 것은 좋아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아쉽습니다. 그나저나 배드민턴 시합으로 미룬 ‘남도 한바퀴’는 언제 다시 할까요? 좋은 날, 다시 받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