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북이
살아오면서 의도적으로 느림을 선택한 순간들이 있다. 남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하느냐 의문을 가질지 모르지만, 나는 그 선택이 옳았음을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 내 모습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싶다.
내가 느림을 선택한 첫 번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선택한 것이었다. 빠른 취업인데 그게 왜 느림의 선택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이 나를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속도로 살아가게 한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가는 것이 당연했고, 그렇지 못하면 공부 못하는 학생, 가난한 학생으로 낙인찍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인문계를 가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뜻과 학비 걱정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공고를 선택했다. 물론 학업 성적이 바닥을 치면서 장학금을 제대로 받아본 적은 없지만. 고등학교 입학 문제로 아버지와 나 자신에게 반항했던 시간이 꽤 길었다. 결석도 잦았다. 졸업을 앞둔 3학년이 되어서는 대학보다 업체 취직을 선택했다. 남들이 모두 치르는 수능, 수험생이 되기를 포기했다.
업체를 다니는 동안 일도 배우고 직장 사람들과 친해졌다. 카오디오를 제조하는 직장이었는데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는 산업체였다. 적은 월급을 받고도 꾸준히 다니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출퇴근하며 일에 익숙해질 무렵, IMF가 터졌다. 회사는 부도가 났고 나는 실직자가 되었다. 결국 군 입대 영장을 받았다.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낭비 같았다. 구속이고 멈춤이라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젊은 청년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았던 입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전역 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할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가, 현역 부사관으로 지원하기를 선택했다.
내가 느림을 선택한 두 번째 순간이었다.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고 미친 거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동기 하나는 잘했다고, 잘할 거라고, 어울린다고 말해주어 힘이 났다.
직업군인이 되기를 선택한 길. 느림을 선택한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좋은 직장에 취직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걸어 나갈 수 있는 길 위에 내가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렇게 23년이 흘렀다. 진급도 느렸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나는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의 아빠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만약 내가 남들처럼 대학 가기를 고집했다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만 했다면 지금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남들이 하는 대로, 남들이 바라는 대로만 했다면 지금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었을까?
느림을 선택한 순간들. 후회와 아픔, 힘듦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지금도 올바른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다시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나는 여전히 느림을 선택할 것이다.
스스로 느림을 선택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나요?
그 느림을 선택한 지금, 그 결과는 어떠한가요?
느림은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아닌, 결핍이 아닌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닫는 시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