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지 않으면 나는 사라진다

나는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by jooni

어릴 적 일을 떠올려 보면, 기억나는 것보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분명히 울고 웃었을 수많은 날들이 있었을 텐데, 남아 있는 것은 몇 장의 사진과 희미한 장면 조각뿐이다. 그 시절의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이 두려웠는지, 무엇을 간절히 바랐는지. 아무리 더듬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사실상 사라진 것과 다름없다.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 좋았던 일은 더 좋게, 힘들었던 일은 더 힘들게 기억된다. 때로는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재구성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래서 기억에만 의지하면,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만들어 낸 인물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존재했던 그때의 내가 아니라, 지금의 시선으로 편집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기록은 그 편집을 멈추게 한다. 그날의 언어로, 그날의 감정으로, 그날의 내가 직접 남긴 흔적. 그것은 기억이 아무리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된다. 오래전에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내가 거기 있을 때가 있다. 그때는 그런 것에 마음을 쓰고 있었구나. 그때는 이런 것이 두려웠구나. 기록이 없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과거의 내가, 글 위에 살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잊힌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도, 언젠가는 그 기억이 흐려진다. 사진은 얼굴을 남기지만, 마음을 남기지는 못한다. 오직 기록만이 그때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떤 사람이고자 했는지를 오롯이 전해 줄 수 있다. 기록은 나라는 존재가 이 시간 속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거창한 기록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는 한 줄, 아이가 잠들기 전에 꼭 안아 달라고 했다는 한 줄, 퇴근길에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는 한 줄. 그 한 줄 한 줄이 모여 비로소 내가 된다. 기록하지 않으면, 오늘의 내가 느낀 이 마음도 내일이면 흐려지고, 한 달이면 잊히고, 일 년이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기록하지 않으면 나는 사라진다. 이 말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기록하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의 내가 남긴 한 줄이,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나로 남는다. 그러니 오늘도, 사라지기 전에 한 줄을 남기자. 내가 여기 있었다고. 이렇게 살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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