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은 자기 삶의 관찰자가 된다

나는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by jooni

글을 쓰기 전에는 하루가 그냥 흘러갔다. 아침이 오고, 낮이 지나고, 밤이 찾아왔다. 그 안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이 나를 스쳐 갔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은 다른 일인데, 나는 오랫동안 전자에만 머물러 있었다. 매일을 살았지만, 매일을 보지는 못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다만, 하루를 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 겪고 있는 나 말고, 겪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내가 생긴 것이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이 감정이 뭘까 하고 한 발짝 물러서게 되고, 익숙한 길을 걸으면서도 오늘따라 이 길이 왜 다르게 느껴지지 하고 가만히 살피게 된다. 쓸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쓰는 습관이 만들어 낸 시선이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다.

관찰자가 된다는 것은 삶에서 한 걸음 빠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더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쓰지 않는 사람은 화에 휩쓸린다. 하지만 쓰는 사람은 휩쓸리면서도, 이 화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살피는 눈이 함께 뜬다. 슬픔이 찾아올 때도 마찬가지다. 슬픔에 잠기면서도, 이 슬픔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이 슬픔을 건드렸는지를 가만히 따라간다. 감정에 먹히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나란히 걷게 되는 것. 그것이 관찰자의 시선이 주는 힘이다.

이 시선은 타인을 향할 때도 달라진다. 글을 쓰기 전에는 후임이 실수하면 짜증이 먼저였다. 왜 이것도 못 하는가. 하지만 쓰는 습관이 붙고 나서는, 짜증 너머에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지금 긴장하고 있구나. 처음이라 두려운 거구나. 내가 처음 그 자리에 섰을 때도 저랬을 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은 나를 살피는 데서 시작하지만,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본 사람만이, 타인의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다.

쓰는 사람은 같은 하루를 두 번 산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 번은 겪으면서, 한 번은 쓰면서. 겪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쓸 때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 문장 위에서 비로소 느껴진다. 하루를 되감아 천천히 다시 걷는 일. 그 과정에서 놓쳤던 풍경을 줍고, 스쳐 간 감정을 다시 만나고,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의 무게를 비로소 가늠하게 된다.

쓰는 사람은 자기 삶의 관찰자가 된다. 그리고 관찰자가 된 삶은, 같은 일상이라도 결코 같지 않다. 오늘도 하루가 끝나면 펜을 들어 본다. 오늘의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지나쳤는가. 그 물음 하나가, 흘러가기만 하던 하루를 멈추어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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