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름을 기다리며
여름의 피날레를 장흥에서 보낸다. 장흥에 친한 언니가 산다. 알고 지내는 동안 고향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언니는 음식이 맛있고 물이 깨끗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삼 년 전 여름 그 땅으로 초대받았다.
마을에서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시원하고 뜨거운 바다에서, 고요하고 청명한 산새에서, 시끌벅적한 오일장에서 사 박 오일을 다 썼을까. 모든 것을 멈추어 놓고 오로지 그만의 세상에 머물다 온 것 같았다.
언니의 시골집은 천장이 낮아 허리 숙이며 다녀야 했고 바가지로 부연 물을 퍼내 몸을 씻어야 했다. 편의점은 한참 걸어가야 있고 배달 음식은 전무했다. 서울에 비하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나는 그 후에도 제비가 돌아오듯 장흥을 다시 찾았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에 가봤지만 또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장흥이란 우리나라 남쪽 끝에 있는 시골 마을일 뿐인데 나는 그곳이 그리워 앓는다.
그래, 그 집 보리밭에 홀려 이끌리는지도 모른다. 빨간 지붕 집을 중심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새싹 밭. 길은 최소한으로 내어 사람 사는 자리보다 작물 나는 자리가 더 넓다. 수천, 수만의 보리가 바람에 등 떠밀려 연신 서로를 두드린다. 연녹색의 향연, 보리의 행진이다. 쨍하니 내리쬐는 태양에 보리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아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는 풍경이 그런 눈부신 것이라니. 무료하기는커녕 나는 그들만의 대화에 끼고 싶었다. 풀은 무슨 소리를 내며 그렇게 쑥쑥 자라나나.
한 여름밤의 보리밭은 더 아름답다. 밤공기에 흔들리는 보리들은 잔잔한 물살이 되어 발목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아, 나는 이것을 보러 매해 여기까지 왔구나. 밤하늘 빼곡히 수 놓인 별들이 당장이라도 내 눈 속으로 쏟아질 듯이 돌진해 온다. 아찔한 풍경을 내 고개가 허락하는 데까지 눈에 열심히 받아 담는다. 검은 융단에 깔린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은하수들. 누군가의 눈물처럼 또륵 흐르는 별똥별까지도. 언젠가 집 한 채 값이라던 망원경으로 본 어느 행성의 민낯보다 나를 울리고 떨리게 한다. 그 대가로 도시의 편의를 바쳐야 한다면 일전의 소소한 불편들 쯤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음, 그다음 해도 장흥에 갔다. 여름이다. 올해 역시 며칠 뒤 장흥으로 떠나는 기차표를 끊었다. 제비처럼 잊지 못할 기억을 쫓아 다시 날아든다. 별밤 밑, 보리밭 앞으로.
2022 여름 날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