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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27. 2023

별밤 밑, 보리밭 앞으로

다음 여름을 기다리며

 여름의 피날레를 장흥에서 보낸다. 장흥에 친한 언니가 산다. 알고 지내는 동안 고향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언니는 음식이 맛있고 물이 깨끗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삼 년 전 여름 그 땅으로 초대받았다.


  마을에서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다. 시원하고 뜨거운 바다에서, 고요하고 청명한 산새에서, 시끌벅적한 오일장에서 사 박 오일을 다 썼을까. 모든 것을 멈추어 놓고 오로지 그만의 세상에 머물다 온 것 같았다.

 언니의 시골집은 천장이 낮아 허리 숙이며 다녀야 했고 바가지로 부연 물을 퍼내 몸을 씻어야 했다. 편의점은 한참 걸어가야 있고 배달 음식은 전무했다. 서울에 비하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나는 그 후에도 제비가 돌아오듯 장흥을 다시 찾았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에 가봤지만 또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장흥이란 우리나라 남쪽 끝에 있는 시골 마을일 뿐인데 나는 그곳이 그리워 앓는다.

 그래, 그 집 보리밭에 홀려 이끌리는지도 모른다. 빨간 지붕 집을 중심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새싹 밭. 길은 최소한으로 내어 사람 사는 자리보다 작물 나는 자리가 더 넓다. 수천, 수만의 보리가 바람에 등 떠밀려 연신 서로를 두드린다. 연녹색의 향연, 보리의 행진이다. 쨍하니 내리쬐는 태양에 보리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 같아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는 풍경이 그런 눈부신 것이라니. 무료하기는커녕 나는 그들만의 대화에 끼고 싶었다. 풀은 무슨 소리를 내며 그렇게 쑥쑥 자라나나.


 한 여름밤의 보리밭은 더 아름답다. 밤공기에 흔들리는 보리들은 잔잔한 물살이 되어 발목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아, 나는 이것을 보러 매해 여기까지 왔구나. 밤하늘 빼곡히 수 놓인 별들이 당장이라도 내 눈 속으로 쏟아질 듯이 돌진해 온다. 아찔한 풍경을 내 고개가 허락하는 데까지 눈에 열심히 받아 담는다. 검은 융단에 깔린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은하수들. 누군가의 눈물처럼 또륵 흐르는 별똥별까지도. 언젠가 집 한 채 값이라던 망원경으로 본 어느 행성의 민낯보다 나를 울리고 떨리게 한다. 그 대가로 도시의 편의를 바쳐야 한다면 일전의 소소한 불편들 쯤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음, 그다음 해도 장흥에 갔다. 여름이다. 올해 역시 며칠 뒤 장흥으로 떠나는 기차표를 끊었다. 제비처럼 잊지 못할 기억을 쫓아 다시 날아든다. 별밤 밑, 보리밭 앞으로.





2022 여름 날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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