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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20. 2023

내가 쓰는 이유

그냥 살기보다는

 나는 글을 늦게 뗐다. 또래 아이들은 자음모음을 조합하는데 나는 가나다라도 욀 줄 몰랐다. 한자리에 앉아 작대기를 수십 번씩 긋는 작업은 배움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나는 흙먼지 속을 뒹굴고 나무를 기어오르며 살고 싶었다. 그러면 충분히 행복했다.


 우리 엄마는 아니었다. 자식이 뒤쳐질까 봐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올수록 고민했다. 딸의 성미를 십분 알았던 엄마는 나를 자리에 억지로 앉히기보다 도서관에 데리고 다녔다. 글을 모르는데 책은 어떻게 읽나. 내가 지루함에 몸서리를 쳐도 엄마는 봐주지 않았다. 심심하면 책을 봐. 그 말뿐, 엄마는 혼자 책을 읽었다.      


 할 수 없이 집어든 동물도감이 내 생애 첫 독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물이 좋았다. 다른 생명체에 강하게 이끌렸다. 책을 펼쳐 들었을 당시 황홀경이 되살아난다. 처음 본 책 속에는 다양한 동물의 사진과 그림이 있었다. 두 발로 선 불곰, 눈이 새 빨갛고 큰 개구리, 기러기의 편대. 모두 역동적이면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영상보다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이유는 찰나의 순간만 담겨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컷 다음의 움직임, 소리, 냄새는 오롯이 내 상상의 몫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알 수 없는 폭풍에 휩쓸렸다. 책에 매료된 첫 순간이었다.      


 그 뒤로 도서관이 즐거워졌다. 그 동물도감 시리즈를 꼼꼼히 전부 봤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건 여전했다. 어떤 동물인지, 무슨 행동인지 알려면 글을 알아야 했다. 받침이 없는 글자부터 어려운 글자까지 엄마에게 가져가 물었다. 엄마는 기꺼워하며 언제든 알려주었다. 아이우에오도 모르면서 본능이란 글자를 먼저 알았다. 글이 재밌어졌다.   그렇게 무사히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글을 뗐다. 동화, 만화, 소설까지 읽을 수 있게 됐다.      


 읽는 게 한창 좋을 무렵에 쓰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읽고 싶은 마음 뒤에 따라붙는 자연스러운 섭리인지 모른다. 무작정 썼다. 느낀 대로 적어 내린 글이었다. 처음 쓴 글을 엄마에게 칭찬받았다. 내 글은 부엌 냉장고에 꽤 오래 붙어 있었다.


 종종 글을 쓰게 됐다. 처음에는 칭찬의 잔향을 쫓아 썼는데 남몰래 쓰는 날도 생겼다. 쓰기는 읽기보다 한 차원 너머였다. 나는 뭐든 될 수 있었다. 풍뎅이와 물고기도 될 수 있고 저 멀리 사는 소년이 될 수 도 있었다. 너무 좋으면 썼고 북받쳐도 썼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갈수록 점점 글과 멀어졌다. 입시와 취업 때문에 어떤 감각은 죽어갔다. 본능에 의존해 살아가게 됐다. 겨우 손바닥 만 한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방대한 정보에 짓눌렸다. 외부에서 들이치는 감각만 받아들이고 따랐다. 앞만 보고 달렸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로 가끔씩 헛헛한 마음 한구석만 움켜쥐었다. 어느 날 문득 책방 앞에 다다르고 나서 알았다. 책 속에 둘러싸이고 나서야 내가 읽고 쓰기에서 멀어졌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쓰고 있다. 전보다 신중하고 지긋하게 쓴다. 책방 식구들과 힘을 모아 책도 냈다. 내가 쓴 글을 엮어 책이 나왔다니 신기했다. 엄마는 부엌에 건 첫 글만큼 내 책을 좋아해 줬다.

 얼마 전, 책장에서 어릴 때 쓴 글을 발견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가 서투르지만 뚜렷했다. 글을 쓰면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고 추억을 박제할 수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종이 위에 쏟아 훌훌 털었다.

 글을 쓰는 건 현재를 놓치지 않으려는 기록이자 과거의 내가 미래로 보내는 편지다. 그냥 살기보다는 쓰는 삶이 좋다. 평생 쓰며 살아라. 미래의 내게 편지 한 통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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