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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Apr 04. 2023

승리의 전설, 한 퇴역 경주마에게

서간 수필

 승전아, 정말 오랜만에 너를 떠올린다. 너의 마지막이 참 아팠었는데 지금은 먼 옛날 일처럼 느껴져. 그동안 겪었던 이별이 너무 숱해 내가 무뎌진 걸까. 너의 사진도 오랜만에 꺼내 본다. 


 내가 스무 살, 네가 일곱 살이었을 거야. 학교에서 너를 처음 만났지. 거기에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나는 유독 너에게 눈길이 갔어. 유순한 눈망울 때문이었을까. 승리의 전설이란 이름과 달리 경주마 시절 성적은 부진했다고 들었어. 그래서 많이 매 맞았을 거라고. 처음엔 손을 올리기만 해도 지레 놀랐다는 말을 듣고 네가 참 가여웠다. 너는 겁 많고 소심했지만 담담히 감내하려는 것  같았어. 인내심도 강했고. 어떤 운명도 받아들이겠다는 듯 말이야. 나를 태우고 한 번도 놀라 튀어 나간 적 없었잖아. 어떤 사람들은 한물 간 퇴역 경주마가 얼마나 쓸모 있겠냐고 비웃었지만 나는 믿었어. 너의 인내심과 온순한 천성은 최고의 능력이라고. 


 나는 승마 수업 때마다 너를 타고 싶었어.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말 타는 게 너무 무서웠거든. 가장 순종적이고 착한 너에게 기댔던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말에 대해 지금보다 더 몰랐기 때문이야. 부족한 내 실력이 두려웠던 거겠지. 무지는 공포를 불러오니까. 너희 말들이 낯선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듯이 말이야. 

 사람인 나보다 용감했던 말, 승전아. 나 자신보다 너를 믿었어. 그래서 너의 등이 편안했어. 다른 말들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지만 네가 어떤 말보다도 듬직했어. 보답할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 너를 데리고 산책을 자주 나갔지. 우리 맛있는 풀이 많은 곳을 찾아 돌아다녔잖아. 내가 뜯어주는 풀도 가리지 않고 먹어줘서 고마워. 내가 너와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했듯이 너도 그랬다면 좋겠다.  


 네 허리가 아파서 못 타는 날이 점점 늘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어느샌가부터 너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거든. 나는 네 곁에 있기만 해도 즐거웠어. 

 내가 학교에 일 년 만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너는 또다시 바뀐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허리 통증이 심해져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직감했어.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픈 너를 이용한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어. 너를 아껴줬더라면 좀 더 살다 갔을 텐데. 너는 언제나 그랬듯 떠날 때도 소담한 풀꽃처럼 조용히 떠났다. 


 너와 같은 경주마 품종을 더러브렛이라고 해. ‘철저히 개량된’이라는 뜻 이래. 사람의 필요에 의해 태어나 살아온 삶은 어땠어? 너무 고달프지는 않았니? 

 네 털을 손질해 주다 뒷다리에 차인 적이 생각나. 내 손길이 얼마나 서툴렀으면 참을성 강한 네가 발길질을 했을까 웃음이 난다. 지금이라면 네가 불편하지 않게 매만져 줄 수 있을 텐데....... 


 너를 다시는 만져줄 수 없지만 지금도 내 곁에 말들이 있어. 나는 네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겪어 왔고 앞으로도 겪어야 하겠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너희들에게 무얼 해줄 수 있는지 찾고 싶어. 멈추지 않고 고민하게 해 주어 고맙다. 

 승전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어. 너의 안식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죽는 날까지 고뇌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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