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 감성] EP. 2
내가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듣는 말이 있다.
“너 왜 이렇게 매사에 부정적이야?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쿨찐이라 쿨병이 심해서 좀 시니컬한 경향이 있는 건 맞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매사에 부정적이란 말은 틀렸다. 오히려 내가 그들보다 더 긍정적일 것이라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류 삼류 자기 계발서 또는 힐링 서적 같은 것들에 있는 헛소리들을 무지성으로 받아들이고는 스스로에게 긍정뽕을 주입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느니 진짜 뽕을 맞고 말겠다.
가장 대표적인 “긍정적인 생각”에 대한 (한심한) 예시가 물 반 컵 드립이다.
물 반 컵을 보고는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았네”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
이라는 건데... 나는 이 예시야 말로 가장 긍정뽕의 허점을 잘 들어내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자 이런 가정을 해보자. 저 물에 어떤 이유로 청산가리가 녹아져 있다고 하자. 혹은 박테리아가 증식했다고 해보자. 심지어는 유머 중에 물을 마셨는데 그게 할머니 틀니 담가놓았던 물이라는 것도 있다. 그래서 뇌를 두개골 밖으로 빼서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는 “으왕! 물이 반이나 있네~ 야무지게 마셔야징!” 이라고 할 것인가?
또 다른 가정을 해보자. 내가 사막 한가운데 있고 나 포함 5명이 탈수 증세를 보인다. 물 한 컵을 보통 250ml로 잡는다면 한 명당 25ml씩이다. 그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하면서 웃고 있을 것인가?
가정이 너무 극단적인가? 그렇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가정을 해보자. 우리는 살면서 가끔 단수가 되는 경험을 한다. 공사를 하던가 물탱크 청소를 하던가 뭔 이유에서는 말이다. 그 경우 미리 받아놓은 물은 없고, 나에게는 물이 반 컵이 있다. 그 상황에서 “괜찮아 물이 반 컵이나 있는걸”이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서칭을 하다가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신박한 시각도 있었는데 “물이 반 컵이나 있네”라고 하는 사람은 물을 잘 마시지 않아서 그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물이 반 컵 밖에 없네”라고 하는 사람은 평소에 건강을 위해 물을 많이 마시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거다. 자 이제 어느 쪽이 긍정적이지?
여기까지 글을 읽었으면 “아니 그럼 부정적이 되란 소리냐!”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소리가 지금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부정적이 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뽕에 취하지 말고 “진짜 긍정적”이 되어보자는 이야기다. 술을 마실 때 기부니가 좋아진다고 술만 마실 수는 없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부니가 좋은 뭔가를 찾아야 한다.
내가 긍정이라는 어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된 계기는 우연히 네이버 국어사전에 긍정이라는 글자를 입력했을 때였다.
사전에 긍정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옳다고 인정함.
일정한 판단에서 문제로 되어 있는 주어와 술어와의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일. ‘S는 P이다.’라는 형태의 명제를 참이라고 승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인데 우리가 흔히 쓰는 “좋게 생각하는 것”이나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긍정적 판단이라는 어휘에서 사용하는 예시가 “소금은 짜다” 같은 것이다.
어떤 소금으로 범벅된 음식을 먹고 아 잇 이거 너무 짜!라고 이야기하는 게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이 짜다고 이야기하면 간을 다시 맞출 때 긍정뽕에 취한 사람들은 이것도 감사하다며 소금 범벅을 그냥 먹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믿는 건 가히 종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인용해서 “긍정은 인민의 뽕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위의 물 반 컵 이야기를 다시 한다면 우리가 물 반 컵 남은 것을 마냥 좋게 생각을 하는 것은 긍정뽕에 취한 것이다. “진짜 긍정”적으로 물 반 컵을 바라본다면 가장 심플한 것은 이런 것일 듯하다.
“물이 반 컵 있네? 근데 이걸로 뭘 해볼까?”
우리는 “반이나 있네” 같은 아무 도움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이전에 이 물이 어디서부터 온 건지, 내가 아는 그 물이 맞긴 한 건지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 및 파악과 함께 나에게 이 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금 나의 상황은 어떠한 지에 대하여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실 파악을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지금 내가 이 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지. 이 물을 사용하지 않는 최선의 선택은 무언인지 등을 생각하는 게 “진짜 긍정”이다. 물이 부족하다면 땅을 파던지 오줌을 마시던지 물을 사 오던지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노희영 씨가 마켓오 브라우니를 처음 개발할 때 일화는 “진짜 긍정”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마켓오가 처음 오리온으로 입성했을 때,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었고, 노희영 씨는 거의 찬밥신세였는데 그래도 국민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를 하여 결국 생산을 쉬고 있는 고래밥 라인을 받았는데 노희영 씨는 그 고래밥 라인에서 만들 수 있는 제품 목록을 뽑고 그중 판매량 상위에 있는 제품군들을 추려서 초코칩 쿠키와 파이 등의 제품군을 픽하고 여기서 만들 수 있는 것 중에서 브라우니를 발견했다고 한다.
노희영 씨가 오리온에 입성해서 고래밥 라인을 받아낸 것도 대단하지만 고래밥 라인을 받아낸 후에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라인 안에서 최적의 제품을 생각해냈다는 것은 정말 그녀가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긍정뽕에 취한 사람들이었다면 “강남에서만 통해도 좋아”, “오리온 들어온 것 만 해도 좋은 거야.”, “고래밥 라인에서 초코칩 쿠키 잘 만들면 잘 팔리겠지 긍정적으로 믿자고”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창업을 한 이후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영혼 없는 그리고 막연한 “잘 될 거야”인데 나는 이 말이 너무 싫어서 한 말이 있다.
“스타트업의 성공확률은 통계적으로 4%라고 한다. 고로 내 성공확률도 4%라고 생각해”
그랬더니 따라서 많이 들었던 말이 “긍정적으로 생각해!”인데 진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확률이 4%라고 말하는 나라고 생각한다.
나의 팀 구성, 자금상황, 보유기술, 네트워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우리는 뛰어난 스타트업이 아니고 그렇다면 평균적인 수치인 4%가 성공확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그러면 난 100번 정도 시도하면 대충 4번 정도는 성공할 수 있는 건데 그럼 100번 해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난 막연하게 좋아진다고 믿고 싶진 않고 이게 진짜 긍정이라 생각한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등장하는 마법 물건 중에 소망의 거울이라는 것이 있다. 거울을 보는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인데 덤블도어 교장은 해리포터에게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하며 평생 이것만을 보면서 미쳐가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무한정 좋게만 생각하는 것이 해로운 가장 간단한 이유는 그것이 왜곡이며 자기기만이고 거짓이기 때문이다.
신경 끄기의 기술을 저술한 마크 맨슨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에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부정적 경험을 극복하는 데서 얻어진다.” 부정적 상황을 피하거나, 가라앉히거나, 또는 애써 무시하려는 시도들은 역효과를 낼뿐이다 고통을 회피하는 것도 고통의 일면이며, 고생을 회피하는 것도 결국 고생이다. 실패를 부인하는 것도 실패다
긍정뽕에 취하면 어떻게 해서든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숨기고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는데 이 생각과 감정들은 어디 다른 데로 가지 않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 안에서 쌓이고 쌓인다. 그러면 이것은 몸을 통해서 질병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실제로 로델러는 정신적 고통을 해로운 긍정주의의 벽에 숨겨버리면, 피부 질환부터 과민성 대장 증후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경계하는 부분은 이 긍정뽕이 막연하게 뭐든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게 다행히 잘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아 사실 문제가 있겠다. 긍정뽕이 고착화되는 문제가 있겠네) 그런데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되지 않았을 때는 일반 사람들보다 낙담과 절망의 폭이 큰 것이 문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평소 안 좋은 상황과 잘 마주하고 외면하고 억누르지 않았으면 일종의 회복탄력성이란 게 생겼을 텐데 긍정뽕에 취한 사람들은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피할 수 없는 낙담의 쓰나미를 만나면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그리고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안 한 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가톨릭대 채정호 교수님께서 “당신이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세바시에서 한 강연에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강연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생활을 한 스톡데일의 이야기다. 스톡데일은 수용생활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나는 나가고야 말겠다는 합리적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많은 긍정뽕에 취한 포로들이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나갈 수 있겠지라고 막연하게만 믿었고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부활절에는 나가겠지 이러면서 계속 나가겠지 나가겠지 나가겠지 라는 막연한 믿음을 품은 채 계속 이루어지지 않자 상심이 쌓이고 쌓여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AI엔지니어로서 합리적이고 확률적인 사고의 힘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잘 될 것이라는 것 또한 믿는다.
지금 직면하는 현실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피하지 말고 “긍정”하며 받아들이고 지금 나의 고통 속에서 지금 나의 자원 지금 나의 상황에서 스톡데일처럼 그리고 노희영처럼 우리는 늘 최적인 선택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절대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아닌 상처를 입어도 빨리 나을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낙관주의다 하지만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닌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현실을 영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합리적 낙관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긍정뽕은 죽음까지도 갈 수 있는 해로운 것이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마약 또한 진통제로 사용할 때도 있지 않은가. 이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이며 무의식에 투영되는 확언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같이 만들어가 보자. 근거가 없다면 지금 현실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멋진 근거를 만들어보자. 능력이 없는 데 그저 부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 게 아니라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긍정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잘 만들어가 보자. 결국 우리는 긍정뽕이 아닌 합리적 낙관주의를 무기로 이 전쟁 같은 삶을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