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관찰 일지
*주관적이고 편협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신입 때부터,
내 무기는 사나움이었지..
지금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옛날 PD 선배 중 그 회사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은 내 사수였던 분이다. 그는 여성이었는데, 같은 여성인 나를 보며 자신의 신입 시절을 떠올렸던 것 같다. 어느 날 커피를 사주며 내게 물었다.
"너는 뭘 찍고 싶니?"
"음..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요! 헤헤. 사바나에 가고 싶어요."
나는 예능 PD로 입사했는데 대체 뭔 생각이었을까?
"그렇구나(열린 사람). 카메라 뻗쳐 놓고(설치하고 기다린다는 뜻) 멀~리서 망원으로 사자, 코끼리 주우우욱 당겨 찍는 그거. 보통 PD보다 카메라 감독이 더 중요하지."
또 아무 생각 없이 그렇구나~ 하며 웃는 날 보고 선배는 말했다.
"넌 잘 웃는 게 너의 무기인 것 같아. 나는 어릴 때 그러지 못했거든. 여자이기도 하니까 무시당하기 싫어서 항상 인상 쓰고 다녔어. 그게 내 방식이었는데 너는 너만의 방식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맞다. 그 선배는 외모에서부터 예민한 세련미가 풍겼고, 일이 잘못되거나 어긋났을 때 가차 없이 화를 폭발하기로도 유명했다. 나를 혼낼 때도 그랬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극강의 카리스마, 아니 기세가 느껴졌다. 그만큼 뭐든 대충 한 적이 없다. 예고편을 만들 땐 놀라는 장면, 웃음 빵빵 터지는 장면 같이 임팩트가 강한 컷만 이어 붙이는 경우도 많은데(만들기 쉬우니까), 그 선배는 짧은 예고에서도 스토리 라인을 찾는 사람이었다. 후배로서 따라가긴 어렵지만 '이게 맞지' 싶은 사람. 그런 캐릭터가 결국 성공하는 게 방송 바닥인 것 같다.
같이 프로그램을 성공시킨 다른 선배는 20초짜리 인트로를 만드는 데 3박 4일 날밤을 샜단다. 그래픽 디자이너 옆에 앉아 한 컷 한 컷 상상한 걸 구현하느라...(디자이너에게 애도) 고액에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된 또 다른 선배는 생방송을 준비할 때 카메라 이동 방식을 하나하나 정해놓고 카메라 감독들에게 숙지해달라고 프린트까지 나눠줬다고 한다. 보통 감독님들은 나이 지긋한 베테랑이 많아서 척하면 척이라 그렇게까지 안 한다.
물론 듬성듬성한 성격의 허허실실 PD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나같이 히트작을 못 냈다. 그리고 PD는 히트작이 없으면 그냥 사무직 직장인이다. 성격 좋~고 사람 좋~던 선배들 대부분 '기획 중'이라는 머쓱한 핑계를 대며 사무실에 앉아 시간만 때우기 일쑤였다. 어릴 땐 '일도 안 하는 데 월급 나오고 오히려 좋아!' 생각했는데, 그게 참 사람의 존재를 궁색하게 만드는 일이란 걸 이젠 깨닫게 되었지.
어떤 선배는 그랬다. PD의 가장 큰 덕목이자 능력은 연예인과의 인맥이라고. 사람들도 흔히 방송의 성공 요인은 PD의 운과 감, 그리고 연예인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는 꾸준히 시도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