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천재, 리스트

건반 위에 펼쳐진 열정의 서사시

by 소담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초상화.


천재는 일찍 죽는다고 했던가.

대저 아름다운 꽃이 일찍 시들듯 많은 천재들이 짧은 생을 살다 갔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마치 미다스의 손처럼 뛰어난 재능 뒤에 숨어 있는 저주, 예민함과 고독함 때문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츠 리스트는 이례적인 존재였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천재성, 또한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진정한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이자 혁명가였다.


리스트는 천부적인 체력과 재능, 호기로운 야심과 뜨거운 열정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다른 낭만주의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긴 생을 누리며 피아노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역사상 유례없는 '피아노 비르투오소(virtuoso)'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단순히 건반을 두드리는 것을 넘어, 단순한 악사에 불과했던 피아니스트를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그의 연주회는 당대 최고의 문화 이벤트로 여겨졌다. 이것이 그가 낭만주의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산증인이 된 이유다.


리스트의 콘서트를 묘사한 캐리커쳐. 당시 그의 인기와 파급력이 어떠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리스트의 연주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의 손끝에서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를 넘어 오케스트라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소리를 뿜어내는 마법의 도구로 변모했다. 마치 맹렬한 폭풍처럼 몰아치다가도 이내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변하며, 듣는 이를 압도적인 기교와 뜨거운 열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치는 마성의 연주력이었다.


이렇듯 그의 화려한 연주 실력은 동시대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귀감과 동경심을 갖게 주었지만 특히 한 사람과는 특별한 관계였는데, 바로 프레데리크 쇼팽이었다.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


리스트와 쇼팽은 서로 친구이면서도 라이벌인, 참으로 미묘한 사이였다. 한 사람은 섬세하고 내밀한 서정성을, 또 한 사람은 폭발적인 기교와 대담한 스케일을 추구하며, 서로 다른 색채의 낭만으로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그들의 우정과 경쟁은 사뭇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의 두 가지 극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리스트 - 라 캄파넬라 / 연주. 예브게니 키신


리스트의 비르투오소적 면모와 피아노에 대한 경이로운 통찰은 그의 대표작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S.141)>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이 곡은 피아노가 낼 수 있는 기교의 극한을 보여주며, 마치 우아한 두루미의 발짓처럼, 명랑한 요조숙녀의 발걸음처럼, 영롱한 고음의 멜로디와 현란한 타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때로는 손가락이 꼬일 듯한 난해한 도약이 등장하고, 때로는 섬세한 터치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라 캄파넬라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를 넘어, 피아노가 가진 모든 음역과 음색을 활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리스트의 천재성이 담겨 있다. 듣는 이로 하여금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를 품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이 곡은, 그야말로 리스트가 피아노의 한계를 어떻게 초월했는지 보여주는 기념비와도 같다.


교향시 '마제파(Mazeppa)' / 연주. 베를린 필하모닉 &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또한 리스트의 천재성은 비단 폭발적인 기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피아노의 마술사라는 명성을 넘어, 문학적 주제를 서사적 음악과 융합한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함으로써, 오케스트라 음악의 지평을 확장시킨 선구자이기도 하다. 특히 <마제파(Mazeppa, S.100)>는 리스트의 교향시 중 가장 서사적이고 역동적인 작품으로, 극한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굴하지 않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생생히 직조해낸다.


그러나 리스트의 음악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서정적인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그의 아름다운 피아노 소품인 <사랑의 꿈(Liebesträum, S.541)>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리스트 - 사랑의 꿈(Liebesträum) / 연주. 다니엘 바렌보임


평소 그의 정열과 대단한 자부심과는 대비되는 이 곡은, 마지 세상의 모든 '1등'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뇌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어딘지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시작하는 피아노 멜로디는 사뭇 치명적이다. 사람의 심금을 대패로 저미는 듯한 이 감정은 어느 깊은 여름밤, 잠을 자다 흠뻑 젖은 몸으로 일어난 남자가 빈 침대를 둘러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과 같다.


노년의 리스트. 젊은 날의 뜨거웠던 열정은 황혼기에 접어들며 깊은 세월의 관록으로 변하였다.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모든 게 덧없음과 상실, 그리고 회한만이 남았음을 깨닫는 순간의 아련함'사랑의 꿈'이라는 이름처럼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비극을 노래하는 듯하다. 그의 영혼 속에서 길어 올린 이 서정적인 선율은 건반 위에 써 내려간 삶의 진실한 비가(悲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추천곡

- 위안 (Consolations, S.172)

- 헝가리 광시곡 (Hungarian Rhapsodies, S.244)

- 오베르만의 골짜기 (Vallée d'Obermann from Années de pèlerinage, S.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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