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연못에서 길어올린 낭만
브람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주로 경쾌한 <헝가리 무곡(Hungarian Dance No.5)>을 떠올리곤 한다. 허나 그의 전반적인 음악은 그런 활달함이나 낭만주의 음악 특유의 서정성, 웅장함과는 달리 묵직하고 정숙한 중저음을 중심으로 차분하고 관조적인 분위기를 이룬다. 그래서일까, 브람스의 음악은 유독 가을에 어울린다고들 한다.
낭만주의의 감각적인 선율에 익숙했던 나는 브람스의 음악을 접했을 때 그의 음악이 주는 생경함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처음 그의 곡을 들었을 때의 인상은, 마치 비 내린 뒤의 진흙길을 걷는 듯 눅눅하고 질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거듭 반복해서 들을수록 그의 음악이 주는 차분함과 중후함에 서서히 빠져들게 되었다. 그저 기교나 숙련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마치 삶 자체를 오선지에 옮긴 듯한 진솔함이었다.
브람스의 음악에 스며 있는 무거움은 그의 순탄찮던 삶의 궤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브람스는 독일 북부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가난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선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유년기의 고생은 그의 내면에 깊은 고뇌와 현실의 무게를 새겨 넣었다. 언뜻 활기찬 듯 들리는 <헝가리 무곡>조차도, 집시 음악의 강렬한 리듬 속에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청년기에도 브람스는 순회 연주를 하며 힘겹게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와중 브람스는 저명한 음악 평론가인 로베르트 슈만을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천재성을 인정받고 음악가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하지만 외부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브람스는 늘 내면의 고독과 싸워야 했다. 그는 평소 특유의 완벽주의적인 성향과 내성적인 성격 탓에 대인 관계에서도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내면의 고독과 성찰, 완벽을 추구하는 기질은 브람스의 음악관에도 깊이 투영되었다. 이런 그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어 중 하나는 바로 ‘보수적’이다.
여기서 보수적이란 단순히 고루하거나 고지식하다는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보수란 과거의 잔재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기보다, 그 본질을 짚어 새로움을 발견해 나가는 데 있다. 창조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창조는 무(無)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해체하고 그 파편 위에 새로움을 쌓아가는 지난한 분투의 과정인 것이다.
음악사에서도 전위적인 시도가 언제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외려 그런 시도가 이질적이고 낯설다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브람스는 당시 유행의 조류에 편승하기보다는 바흐·모차르트·하이든 같은 선배 작곡가들이 구축한 전통적 형식미를 고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람스는 과거의 틀에 안주한 수구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브람스는 그 속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고전의 미학을 자신만의 언어로 각색하고 확장하며, 역설적으로 새로움을 창출해냈다.
브람스는 대위법과 소나타 형식 같은 전통적 음악 요소를 존중하되, 그 견고한 틀 안에 감정의 결과 내면의 고요함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음악적 특징은 브람스의 작품 전반에 걸쳐 두드러지는데, 그의 필생의 역작인 <교향곡 1번(Symphony No. 1, Op. 68)>에서는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한 브람스의 치열한 고뇌와 집념이 비장하게 펼쳐진다.
이와 대비되는 <클라리넷 5중주 B단조(Clarinet Quintet in B minor Op. 115)>에서는 차분하고 청아한 선율로 깊은 사색을 유도하고, <6개의 피아노 소품, 인터메조(6 Klavierstücke, Op. 118, No.2 - Intermezzo)> 같은 작품들에서는 내밀한 고독과 섬세한 감정이 절제된 어조로 담겨 있어 그의 내면을 다채롭게 비추어준다.
이렇듯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감수성을 품어내면서도 기존의 음악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마치 정해진 율격에 따라 시를 짓는 시인처럼, 그는 고전의 틀 안에서 낭만을 읊조린 음악가였다. 그리하여 브람스의 음악은 단순히 우울하거나 무거운 음악이 아닌, 심도 깊은 사유와 진실한 신념이 반영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작곡가로서의 고민뿐 아니라, 자신의 은인이자 스승이었던 로베르트 슈만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내 클라라 슈만과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야 했던 삶의 무게가 배어 있다. 클라라 슈만과의 관계는 브람스의 음악이 가진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다.
브람스는 슈만의 사후에도 클라라와 편지를 통해 오랜 친교를 나누었으며, 클라라와 그녀의 아기를 위해 쓴 작품 <두 개의 가곡(Zwei Gesänge), Op. 91>은 그녀를 향한 브람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와 같이 브람스는 자신의 음악 안에 무거운 책임감과 사랑, 아울러 인간적인 헌신을 담고 있으며, 그 모든 경험이 그의 음악에 깊이감과 진정성을 불어넣는다.
그의 음악이 전하는 진정성은 때로 유창한 언변보다 소박한 눌변이 더 큰 호소력을 지닌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중국 법가의 창시자인 한비자는 선천적으로 심각한 말더듬이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진중하고 담백한 '글'이라는 형태로 남겨 시대를 넘어선 깊은 통찰과 울림을 선사했다. 이렇듯 브람스의 선율 또한 절제된 음악 속에 삶과 진심을 담아낸다.
브람스의 음악은 오래된 떡갈나무처럼 우직하고 진중하며, 세월을 견딜수록 더욱 진한 울림을 품는다. 화려함이나 즉각적인 자극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드러나는 중후한 깊이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울리는 브람스의 진정성 어린 음악은 잔잔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 교향곡 3번 F장조, 3악장(Symphony No. 3 in F major, III. Poco Allegrato, Op. 90)
- 피아노 협주곡 2번 B♭장조(Piano Concerto No. 2 in B flat major, Op. 83)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