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白夜)의 낭만주의자, 차이코프스키

슬픔과 환희를 넘나든 영혼의 여행기

by 소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어떤 이는 평생 자신이 속할 곳을 찾아 헤맨다. 아늑한 집 안에서도 불편함을 느끼고, 또 익숙한 고향의 땅에서도 이방인의 외로움을 느끼며, 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고독과 소외감을 마주한다. 광막한 길 위에 처연히 선 방랑자, 차이코프스키가 바로 그러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에서 오는 정서와 서유럽의 풍요롭고 섬세한 감성이 융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깊은 우울과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수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원.


러시아의 음악원에서 서구식 음악 교육을 받은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주류였던 5인조로부터 '전혀 러시아적이지 않다'는 냉랭한 혹평을 받아야 했다. 러시아인이었지만 스스로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처지를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나 차이코프스키의 예술혼은 식지 않았다. 그는 서구주의자라는 세간의 냉대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서유럽적인 음악 문법으로, 가장 민족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차이코프스키 - <백조의 호수>
차이코프스키 - <호두까기 인형>

그의 이러한 음악 세계는 발레 음악에서 혁혁한 빛을 발한다. 이전까지 발레 음악은 그저 무용을 위한 부수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는, 말 그대로 '배경 음악'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로 발레 음악에 교향곡에 버금가는 서사와 장대함, 그리고 감정선을 부여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로써 발레곡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불후의 명작으로 회자되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은 그의 혁신적인 시도가 낳은 대표적인 작이다.


백조의 호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 속에 운명에 좌지우지당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냈고, 호두까기 인형은 마치 꿈 속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와 다채로운 멜로디로 크리스마스 밤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소동을 묘사함으로써 지금도 전세계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 <호두까기 인형> 中 "꽃의 왈츠"


특히 그는 뛰어난 관현악 기법을 통해 발레 음악의 표현력을 극대화했다. 현악기의 서정적인 선율, 목관악기의 다채로운 음색, 금관악기의 웅장함, 그리고 타악기의 섬세한 사용은 각 장면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인물의 감정 변화를 풍부하게 그려내며, 마치 오케스트라가 각각의 태엽으로써 하나의 자동 인형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다면 차이코프스키를 온전히 설명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음악 편력은 발레 무대를 넘어 더 넓은 곳으로 확장되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정서’라는 본질이 놓여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감정과 정체성, 불안과 고독을 음악이라는 언어로 빚어내며, 누구보다 솔직하게 내면을 고백한 작곡가였다.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 / 예브게니 키신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이러한 감정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걸작이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서주의 금관은 마치 세상에 던지는 결연한 선언 같고, 이어지는 피아노 독주는 격렬한 심장의 고동처럼 흉금을 울린다. 서구적인 형식미 위에 러시아의 전통적 선율을 얹은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가 외부 세계와 갈등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해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격정과 감미로움이 서로 맞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마치 그의 인생 자체를 연주하는 듯하다.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6번 "비창"> 4악장 / 베를린 필하모닉


그러나 이러한 격정 속에서도 차이코프스키를 짓누르는 내면의 어둠과 존재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피로와 우울,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은 그를 더욱 짙은 심연으로 끌고 갔고, 이러한 내면의 심연은 <교향곡 6번 "비창"(Symphony No.6 “Pathétique”)>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작품은 단순히 비극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생을 정리하며 세상에 남기는 쓸쓸한 유언처럼 들린다.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고요하게 가라앉는 선율은 어떤 일말의 희망도 없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거품과도 같다. 삶이 끝난 자리에 남은 건, 오직 진실한 감정뿐이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절망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독한 고독과 무거운 우울 속에서도, 그는 때때로 삶의 애틋하고 순수한 순간들을 놓지 않았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비록 찰나일지라도, 지극히 인간적인 온기와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 존재했다. 이는 그의 짧은 피아노곡인 <센티멘탈 왈츠(Valse Sentimentale In F Minor, Op. 51, No.6)>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차이코프스키 - 센티멘탈 왈츠


화려한 기교나 웅장한 서사 대신,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선율로 시작되는 이 곡은 마치 쓸쓸한 미소와 함께 지나간 행복을 추억하는 듯하다. 경쾌한 왈츠곡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안에는 말할 수 없는 회한과 아련함이 스며들어 있다.


황량한 삶 가운데에서도 한 떨기 꽃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추억, 영원히 닿지 못할 꿈을 가슴에 품은 듯한 이 애상적인 멜로디는 사뭇 그가 자신과 세상에 건네는 가장 진실하고 따뜻한 위안으로 느껴진다.




백야의 하늘처럼 환하고도 어스름한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은, 광막한 길 위에서 평생을 방황하며 이방인의 외로움을 느껴야 했던,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될 수 없었던 한 영혼이 빚어낸 가장 진실하고 고독하며, 그래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방랑이다.




추천곡

- 피아노 모음곡 <사계>, Op. 37a (The Seasons, Op. 37a)
- 교향곡 4번 F단조, Op. 36 (Symphony No. 4 in F minor, Op. 36)
-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Op. 48 (Serenade for Strings in C major, O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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