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익숙한 풍경 속, 변해버린 것들
아침저녁 쉴 새 없이 바뀌는 날씨 탓에 요즘 자주 코를 훌쩍입니다.
화장실 앞에 씻겨 놓고 분해해 둔 선풍기는 아직 조립하지 못한 채 계절의 경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름인지 봄인지 모를 날씨처럼, 나의 마음도 어딘가 애매한 곳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어김없이 한바탕 꾸지람을 하십니다.
어릴 때부터 듣던 그 꾸지람은 늘 같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조금 작아졌고, 체구도 어느새 눈에 띄게 작아졌습니다.
한결같은 잔소리 속에서도, 나는 이제 그 말들 너머로 세월의 흐름을 느낍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어머니의 꾸지람도 멈출까?
아니요, 아마 아닐 겁니다. 어머니는 한결같을 테니까요. 시간이 지나도, 그 꾸지람은 나를 지켜주는 벽처럼 변함없겠지요.
2.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나는 벌써 스무 해 넘는 시간을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요즘 들어 그 속도가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사회에서는 적지 않은 나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스무 살 즈음엔 하루 종일 잠으로만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지는 대로, 들개처럼 방황하고,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롭던 시절.
그 시절의 하루들은, 낮잠처럼 짧고 허무하게 흘러가버렸습니다.
이제는 자는 시간조차 아까워졌습니다.
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고 싶고, 무언가를 느끼고 기억해두고 싶습니다.
시간은 흐르기만 하고, 멈추지 않으니까요.
3. 불안과 평범함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우린, 다가올 시간들이 점점 두렵기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는 늘 달리는 열차처럼 멈출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도 내 불안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들과 비슷하지만, 뒤처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튀지도 않는 삶.
그런 ‘평범한 삶’을 나는 오랫동안 동경해 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게 됐습니다.
‘평범하게 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남들보다 특별하지 않게, 큰 문제없이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역경을 지니고 있고,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에겐 너무 버거운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건 그 사람의 평범함을, 혹은 고통을, 내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작고 느리던 여름의 기억
요즘은 여름이 더 이상 덥지 않습니다.
뉴스에서는 매년, 작년보다 더 뜨거운 여름이 올 거라 하지만, 나는 점점 그 더위를 느끼지 못합니다.
늘 에어컨 아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으니까요.
언제부턴가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그 소리가 한때는 귀찮았는데, 이제는 아예 들을 새도 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나 봅니다.
혹은, 내가 세상 소리를 차단하는 데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여름, 마치 사막처럼 넓게만 느껴졌던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풍경.
해가 아직 뜨거웠던 오후 두 시, 내 그림자는 내 키보다 갑절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나는 멋진 나뭇가지 하나를 끌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죠.
그때는 하루가 참 길었습니다.
시간은 느렸고, 풍경은 선명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눈 깜짝할 사이 하루가 저물고, 기억도 희미해져 갑니다.
5. 이번 여름은 더 뜨거울 것 같습니다.
좋은 삶이란, 꼭 특별하거나 눈부셔야 할까요?
나는 가끔 한 그루의 나무처럼, 숲 속에 묻혀 살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하지만 견고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
그것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물론, 재미는 없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즐거움이란, 어쩌면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은 어쩌면 너무 편리하고, 너무 계산적이고, 그래서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이번 여름은, 아마 조금 더 뜨거운 여름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뜨거움을 온전히 느끼고 싶습니다.
매미 소리, 해의 냄새, 운동장의 흙냄새, 길어진 내 그림자.
잊지 않기 위해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계절을 조금 더 천천히 살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