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솜사탕 Mar 29. 2023

어느 꽃송이가 들려준 인생철학

식물을 가꾸며 인생을 배우다

 나는 ‘죽음의  가지고 태어났다. 다행스럽게도 식물 한정이다.  손에 닿으면 집안 식물들은 말라죽거나 과습 때문에  터져 죽기 바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희생양은 바로 목화다. 초등학교 시절 일이다. 목화를 씨부터 키워오는 여름방학 숙제가 있었지만 싹도 제대로  틔운  결국 죽고 말았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에 안목이 없는 사람이었다. ‘잡초는 뽑아야 한다.’ 생각에 사로잡혀 바오바브나무 싹을 뽑아내는 어린 왕자처럼 어린 목화 싹을 모조리 뽑아버렸으니 말이다. 다육식물이나 허브도 시도했지만 모두  개월을  살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연을 집으로 끌어들이니까 죽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재능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자기 생각 속 ‘이기적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걸 몰랐다. 어쨌든 간에 나는 식물 키우기를 몇 번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가 데려오기만 하면 죽어 나가니 피 묻히지 않는 살인자의 기분이라서 더는 키울 수 없었다.

 이런 내가 다시 식물에 눈길이 간 건 28살 무렵이었다. 직장을 처음 갖고 매일같이 사람들 속에서 치열한 나날을 보내서인지 초록이 그리워졌다.

 ‘서울에 숲 향기 가득한 곳이 없을까?’

 멀리 가긴 귀찮고 숲은 즐기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나는 양재꽃시장을 찾았다. 사실 눈이 안 보이는 입장에서 굳이 숲을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숲과 비슷한 향을 즐길 그럴싸한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다. 예상대로 하우스 안은 피톤치드 향으로 가득했고 물건을 파는 곳답게 화분을 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렇게 식물이 많은데 내가 키울 만한 것도 하나쯤 있지 않을까?’

 어른 비슷한 것이 되었으니 이제 잘 키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에 괜히 우쭐해졌다. 나는 어느 가게 앞에 섰다. 그런데 식물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탓에 곧장 사장님께 추천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님은 공기청정 역할을 하면서 정말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녀석이라는 이유로 크루시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녀석을 덜컥 데려와 버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희생양이 더 늘어날 것을 대비해 아주 작은 화분을 골랐다. 자칫 욕심으로 커다란 아이를 데려왔다가 죽으면 텅 비어버린 황량한 흙밭을 전시하는 착잡한 엔딩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쿠로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일본어로 ‘고생’이란 뜻인데 크루시아의 크루와 비슷한 발음에 내 품으로 왔으니 앞으로 고생이 참 많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이럴 때 보면 쓸데없는 부분에서 진지한 사람이다 싶어지지만 나는 물을 줄 때마다 꼭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고쿠로는 무럭무럭 컸다. 분갈이도 한 번 했다. 내 손에서 죽지 않은 1호 초록 친구였다. 물론 잎사귀 솎아주기 같은 화훼 스킬은 없기 때문에 질서 없이 덥수룩한 초록 잎을 가진 땅딸보가 되었다.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화분에 담긴 야생화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감동했기에 다음 식물을 도전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아파트 벤치 밑에 빼꼼 고개 내밀었던 보랏빛 얼굴이 떠올랐다. 따스한 봄날 햇살 아래 제비꽃과 나란히 앉아있던 순간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 짙은 보랏빛은 가녀린 몸매에 맞지 않는 시크한 도시 여자 같달까. 나는 야생화이지만 도도한 매력이 있는 제비꽃을 참 좋아했다.

 “꼭 보라색 제비꽃이어야 해.”

 나는 테디베어에게 모종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며 신신당부했다. 스스로 구하고 싶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뭔 제비꽃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원산지와 종에 따라 노란색, 분홍색, 흰색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인터넷 쇼핑몰은 이미지 사진 한 장만 띡 올려져있어서 어느 게 무슨 꽃이 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안 보이는 몸이니 노란색 제비꽃을 보라색이라 둔갑시켜 상상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지만 이상하게도 보라색을 포기하지 못했다. 테디베어는 백과사전을 검색해서 보라색 꽃이 피는 제비꽃 모종을 하나 주문해주었다.

 이른 3월의 일이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부지런히 길러서 5월에 꽃을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오기를 기다렸다.

 모종이 도착했다. 초코파이 지름만 한 작은 포트에 담겨있었다. 다치지 않게 손가락으로 살살 어린잎을 만져보았다. 싹이라기보단 이끼같이 축축했고 보송보송한 솜털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도 녹색 잎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저 옹기종기 피어난 꽃망울만 바라보았다. ‘제비꽃 잎은 이런 느낌이었구나! 분명 메로나 아이스크림 색깔일 거야!’ 나는 혼자 그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3일째 되는 날 포트에서 화분으로 집을 옮겨 주었다. 아직 어린 탓에 아빠 옷을 입은 듯 화분이 헐렁헐렁했지만 잔뿌리를 많이 내는 꽃이기에 넉넉한 집을 마련해주었다.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데 괜찮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봄날’이라 부르기로 했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봄날’은 성실하게 잎을 내어 화분 위를 채워갔다. 그런데 봄날은 내 의도와 다르게 상남자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촉촉하게 자랄 줄 알았는데 영화 <해리포터> 속 등장인물 해그리드 수염처럼 마구잡이로 거칠게 잎을 뻗었다. 줄기를 낼 생각은 않고 잎사귀만 켜켜이 위로 위로 쌓아갔다. 날이 갈수록 ‘봄날’이란 이름과 멀어져 가는 듯했다. 2차 성징으로 귀여움을 잃은 아들 모습을 보는 게 이런 기분일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얘 제비꽃 아닌 거 아냐? 내가 아는 거랑 느낌이 너무 다른데...’

 입양 2달 무렵이 되자 오배송이 의심되었다. 생각해 보니 애당초 나는 제비꽃 모종의 생김새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제비꽃을 주문했으니까 그냥 잘 왔으려니 믿었던 것이다. 모양이 비슷한 식물들은 종종 파는 사람들이 실수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나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그렇게 보면 우리 집 아이가 제대로 왔다는 보장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꽃대가 올라와야 할 5월이 되어도 봄날은 솜털 달린 투박한 잎사귀만 생산하고 있었다.

 ‘영양분이 부족해서 그런가?’

 나는 혹시나 해서 영양제를 주었다. 이제 와서 교환이라는 둥, 환불해달라는 둥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매일 베란다로 아침 인사를 나간 덕분에 완전히 봄날에게 정들어 버렸다. 물을 많이 주면 꽃이 안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물주기를 바꿔보기도 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던 나는 어느새인가 꼭 꽃을 보고 말겠노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봄날은 초여름이 될 때까지도 잎사귀만 늘리고 있었다. 부숭부숭한 솜털을 만질 때마다 나는 내가 옷을 껴입은 듯이 덩달아 더워졌다. 이름을 해그리드로 바꿨다. 그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야생화이니 처음부터 녀석은 봄날보다는 숲의 파수꾼, 해그리드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몰랐다.

 6월에 접어든 어느 날, 나는 답답함에 검색을 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다.

 “글쎄, 얘 말야 가을에 피는 제비꽃이래!!”

 제비꽃 중에서 가을에 피는 종도 있었던 것이다. 암동 제비꽃은 그런 녀석이었다. 찬 바람이 불어올 무렵 피어나는 귀한 가을 야생화였다. 9~10월경에 만개한다는 걸 보면 왜 이 녀석이 털옷을 입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찬바람을 맞아도 끄떡없이 꽃을 피워내기 위한 갑옷인 셈이다. 그런데 해그리드가 정말 제비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우선 10월에 꽃이 정말 피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3월 초에 데려와서 꽃을 보는 데에 7개월을 들여야 한다니 기운이 쫙 빠져나갔다. 그것도 아직 확신할 수 없는 기다림이다. 질서 없이 뒤죽박죽 자라나는 이파리에 물 주기를 4개월이나 더 해야 실체를 알 수 있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지만 한 편으로는 ‘제비꽃을 볼 수 있다’라는 희망이 다시 싹트는 듯했다.

 ‘이래놓고 알고 보니 진짜 제비꽃 아닌 거 아냐? 그냥 풀떼기 아냐?’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풀밭이었다. 물을 주면서도 마음속에서 의심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나는 덥수룩한 해그리드 머리를 쓰다듬었다. 크고 질긴 싱싱한 잎들이 수북했다. 해그리드는 내 악한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베란다에서 여름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죽음의 손 아래에서 용케 잘 살아주고 있었다. 나는 0으로 돌아간 자세로 남은 3개월을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 죽이지 말자’라는 초심으로 마음속 바늘을 되돌렸다.

 시든 잎을 따 주고 물 주기와 채광을 신경 써서 가꾸기 시작했다. 야생화라서 겉모습은 여전히 볼품없는 풀떼기였다. 하지만 우리 집이 제법 맘에 드는지 어느새 화분 위를 가득 덮을 만큼 잎을 키웠다. 처음 분갈이했을 때는 화분의 반도 채우지 못해 텅텅 비었는데 말이다. 나는 매일 같이 해그리드에게 안부를 묻고 햇살 받기 좋은 곳으로 옮겨 주었다. 녀석도 마음에 든다는 듯 초록 향을 뿜으며 보송보송한 털옷을 더욱 껴입었다.

 “어? 이게 뭐지?”

 해그리드 머리를 빗겨주다가 잎 사이로 비집고 나온 가느다란 무언가를 발견했다. 돼지 꼬리처럼 살짝 말린 그것은 여기저기 잎 더미 사이에 숨어 있었다. 드디어 꽃대가 나온 건가!! 베란다 너머 낙엽 지는 향기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9월 말, 해그리드는 줄기를 7개나 올렸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그것의 끝엔 둥근 꽃봉오리가 맺혀있어서 마치 더듬이 같았다. 거칠고 뻣뻣한 잎사귀와 달리 가녀린 얇은 줄기는 촉촉하고 매끈했다. 그 끝에 매달린 작은 구슬이 보라색이라고 테디베어가 말했다.

 꽃이 피었다. 웅크리고 있던 꽃잎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뽕뽕뽕 검지 손톱만 한 일곱 얼굴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창밖이 비칠 것같이 얇고 여린 꽃잎이 가을바람에 그네 타듯 흔들렸다. 7개월 만에 나는 드디어 꽃을 보았다. 해그리드는 제비꽃이 맞았다!

 해그리드는 한 달 가까이 꽃을 피웠다. 여러 차례 새로운 꽃대를 올려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열심히 가을날을 불태운 녀석은 11월 말 뽁뽁이 이불을 덮고 겨울잠에 들어갔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눈을 떴다. 2월의 봄 닮은 햇살에 속은 모양인지 생각보다 일찍 새싹을 올리고 있다. 꽃을 보려면 또다시 반년의 기다림이 찾아온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덥수룩한 머리로 햇살 밑에 뒹굴뒹굴할 것이다. 나는 물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해 줄 수 없다. ‘언젠가 꽃이 피겠지’라고 여기면서 올가을을 막연하게 기다릴 것이다.

 처음 화분을 가져왔을 때 나는 분명 ‘죽이지만 말자.’고 생각했다. 키도 쑥쑥 키우고 잎사귀도 얼굴만큼 크게 만들어야겠다는 꿈 따윈 꾸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작은 생명이 곁에서 죽지 않고 소소한 일상을 함께 보내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욕심이 생겨 조바심에 꽃피우기를 강요하고 심지어 의심까지 했으니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

이 작은 화분은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주었다. 꿈을 향해 달리는 인간의 모습이랄까. 아니면 아이를 키울 때의 마음이랄까. 비록 미혼에 아이가 없지만 말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무성한 이파리만 키우는 해그리드를 보면서 초조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기대보다 작은 꽃을 피웠음에도 어찌나 기특하던지. 모든 게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하루하루 내가 걷는 이 길이 자신이 목표한 바에 도달하게 해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7개월이란 시간 속에서 해그리드의 정체를 의심했듯이, ‘정말 내가 그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만 불안해진다. 자식이라면 내 속은 타들어 가는데 녀석은 속 좋게 햇살 밑에 누워서 광합성만 하고 있으니 미쳐버릴 거 같다. 하지만 재촉한들 하루아침에 목표나 꿈에 도달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냥 ‘제비꽃일 거야.’라거나 ‘기회를 주자.’라는 마음으로 실망감을 감춘 채 묵묵히 내가 할 일을 하는 게 최선이다. 해그리드가 잎을 키우는 시간이 필요했듯이 사람도 그런 세월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이 나이에는 이래야지.” “니 또래 좀 봐라.”

 분명 같은 제비꽃이다. 하지만 봄에 피는 제비꽃인지 가을에 피는 제비꽃인지 눈썰미가 있지 않다면 초보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꽃이 피고 나서야 깨닫는다. 때가 되지 않아서 아직 꽃봉오리를 맺지 않은 것을 못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그렇게 되려니 하면서 자신에게, 자녀에게 계속 기회를 주고 하루하루 맡은 역할을 잊지 않는 자세가 인생에서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해그리드를 창가에 옮겨 주었다. 그 옆으로 수국, 은방울꽃이 나란히 자리 잡았다. 어느새 식구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햇살 좋은 날 야생화인 녀석들이 음지에만 있으면 얼마나 속상할까? 그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었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해그리드와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다. 키보드 왼편엔 크루시아, 고쿠로가 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늘 가까이 두고 있다. 나는 언제 도달할지 모르는 목표를 향해 키보드를 두드린다. 녀석들에게 물을 주듯이 ‘언젠가 되겠지.’ 하면서.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하지만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면서 느긋하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내주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누군가 비밀스럽게 두고 간 선물처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피어난 꽃송이를 발견하겠지? 왠지 올해는 작년보다 일찍 꽃이 필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