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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솜사탕 Apr 01. 2023

동반입사

직장생활의 시작

 안내견학교 합숙이 정해지고 며칠 , 익숙한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OOO학습지원센터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점자동화책교정 자원봉사를 했던 센터였다.

 “혹시 괜찮으시면 점자 동화책 만드는 아르바이트해 보는 거 어때요?”

 “제가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점자를 배운지 고작 2년도 되지 않는 내가 돈을 받고 일해도 되나. 점자책을 만드는 다른 선천 시각장애인들에 비해 한참 읽기 속도가 느린 내가 이 바닥에 정말 발을 들여도 되는 건가.  

 “그럼요. 점역교정사 자격증 있잖아요. 작년에 그림책 점자 모텍스 제작 자원봉사도 했고. 어때요? 해볼래요?”

 “네? 네, 네! 할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페이든 시간이든 따지지도 않고 얼른 그 제안에 응했다. 당시 내 나이는 27살이었고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취직한 상태여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반에 눈이 나빠지면서 일상생활이 힘들어졌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에게 취업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보이지 않은 무언가로부터 쫓기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는 것, 그리고 결혼을 하는 것. 사회가 정한 인생 컨베이어 벨트에 자신을 올리는 건 얼토당토않는 짓이었지만 ‘백수’는 나란 인간이 안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구하는 데에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가진 거라고는 대학 때 배운 일본어 조금과 점자를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막연히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일 생길 거야’라고 믿으며 성실하게 점자를 공부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일’이 찾아왔다.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불쑥 찾아오는 것이라더니, 사실이었다. 이런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역교정사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점역교정 업무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점자규정을 지켜 올바르게 책을 제작했는지 검토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력과 지구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점자돌기를 만져서 읽어야 하니 팔과 어깨도 쉴 새가 없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녹초가 되어 있었고 잠자기 바빴다. 그나마 아르바이트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타이밍 좋게 도담이를 만난 덕분이지, 흰지팡이로 다녔다면 3개월도 못 버텼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출퇴근이 만만했던 건 아니었다. 도담이는 장애물을 피해주고 신호등 위치로 착실하게 안내해주었지만 센터까지 찾아가는 길은 꽤 복잡했다. 그곳은 역에서 조금 멀어서 20분 이상 언덕진 길을 걸어올라가야 했는데 먹거리골목이 있는 탓에 사람으로 늘 붐비는 거리를 지나야 했다. 중간에 횡단보도를 두 개 건너야 했고 학교나 시장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나도 어엿한 사회인으로서 살 수 있다는 것, 내가 나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멈추지 않게 했다. 시력은 잃었어도 이것만큼 비장애인과 동등해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뭐든 해낼 수 있었다. 감사에 취해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출근을 했다.

 “우리 재단에 인턴 뽑는데 한번 넣어보는 게 어때요? 교정사로.”

 아르바이트 10개월쯤 되었을 무렵, 또 다른 제안이 들어왔다. 이번엔 인턴이었다. 당연히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면접 날이 되었다.

 “점자 배운 지 얼마나 되었어요?”

 “재활교육하고 2년 조금 안 되었습니다.”

 “점자책을 하루 8시간씩 읽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속도도 걱정이고.”

 “음... 확실히 속도는 다른 분들에 비해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느린 만큼 더 꼼꼼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하다 보면 점점 빨라진다고 들었는데 제가 늘지 않을 만큼 불성실하진 않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당돌한 면접이었다. 사실 자신 없었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해도 하루 8시간씩 매일 점자책을 읽는 건 버거운 작업임엔 틀림없었다. 업무 난이도를 떠나 우선 책을 읽는 나의 왼팔이 장시간 계속되는 좌우 왕복운동을 견딜 수 있는지부터 예측 불가능이었다. 직장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상사도 팀원도 모든 동료들을 목소리만 가지고 기억해야 하는 나날의 연속일 터였다. 아르바이트는 관리자 선생님 외엔 교류할 일이 별로 없지만 인턴은 달랐다. 회식도 있고 워크숍도 있을 텐데 수시로 바뀌는 환경 속에서 내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내가 그 어마무시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눈이 안 보이는 내가 무언 속 눈치 게임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복지관이니 적어도 대학생 때처럼 인사를 먼저 안 한다고 뒤에서 욕먹는 일은 없겠지? 내 겉모습이 비장애인이랑 똑같아서 잘 보이는데 안 보이는 척한다고 또 오해받지 않겠지?

 “도담아, 누나 할 수 있을까?”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 학학학

 ‘그럼, 누난 할 수 있어. 내가 계속 곁에서 지켜줄게.’

 도담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 도담이가 있어서 나는 아르바이트도 무사히 해냈고 이렇게 좋은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아마 흰지팡이로 다녔으면 아르바이트 계약만료일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활동지원사랑만 다녔으면 지하철이나 길에서 사람들이 안내견을 매개로 내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을 테고, 나는 계속 낯가림했을 것이다. 그러면 면접을 볼 때 면접관에게 이렇게 당차게 말하지 못했겠지...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집에 도착해 도담이를 수건으로 닦아주는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출근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안내는 문자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첫 출근 날. 나는 원래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 아닌 본사로 발령받았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만 있는 곳이라 안 그래도 캄캄한 눈앞이 더 캄캄했다. 하지만 사무실은 나의 등장과 함께 난리가 났다. 도담이는 빅스타였다. 네 가구 중 한 가구는 반려견을 키우는 시대라서인지 도담이를 예뻐해 주는 직원들이 많았다. 내가 가장 안심했던 건 팀원 누구도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없다는 점과 도담이를 다리 삼아 모든 사람들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준다는 점이었다. 만약 나 혼자 덩그러니 데스크 앞에 앉아있더라면 몇 명이나 다가와 주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수가 많은 외향인일 확률은 매우 적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무난히 첫 번째 단추를 끼우고 나는 운 좋게 전공을 살려 일본어 점자책을 전담하게 되었다. 행복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나는 비록 시력을 잃고 언어 전공자로서 유학도 포기해야 했지만 내 친구들이 하지 못한 전공을 살리는 직업을 손에 넣었다. 사회복지사업인 만큼 다른 회사처럼 넉넉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어도 나는 충분히 나 스스로를 먹일 수 있었고 도담이 배 또한 배불리 채워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자존감의 양분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어떻게 미스가 하나도 없지?”

 담당한 책이 품질 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 느린 만큼 꼼꼼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이로써 나는 면접관과의 약속을 지켰다. 인턴 생활을 하며 일본어 점자도서 제작에 필요한 자격증도 취득했다. 매일 지독하게 점자를 읽었고 1mm라도 성장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인턴 계약 만료일이 한 달도 채 안 남았는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 여기서 멈추는구나. 그래도 진짜 열심히 살았다.’

 데스크 밑 쿠션에서 잠자는 도담이를 쓰다듬었다. 쿠션, 물그릇, 장난감, 간식 등. 어느새 사무실엔 도담이 물건이 가득했다.

 ‘이걸 언제 다 들고 가지... 다음 주부터 슬슬 짐을 싸야겠다.’

 마음 정리를 시작했다. 그래도 좋은 경험했고 대견하다며 보이지 않는 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았으니 충분하다고 위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축하해~ 내년부터 정사원이야.”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장애 판정 5년 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갑자기 시험지가 안 보여서 백지 시험지를 낸 나. 혼란 속에서 이성을 놓지 않고 나머지 시험은 D를 맞을 수 없다며 부랴부랴 복지관에 달려가 도움을 청했던 기억. 어떻게든 졸업은 하겠다고 돋보기를 들고 치렀던 마지막 학기 시험. 한번 집에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못 나올 것 같아서 이리저리 부딪치고 사람들에게 욕먹으면서도 거리를 배회했던 나날. 그러면서도 항상 웃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걱정할 거 같아서 괜찮은 척했다. 그렇게 나는 힘들다고 말 한번 하지 않고서 자신만 믿고 달려왔다.

 “정사원이 뭐라고 그치?”

 나는 집으로 돌아와 눈물을 훔치며 도담이에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정사원이 뭐라고. 고작 그 세 글자를 들었다고 지난날들의 고통이 한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다.

 ‘애썼어, 애썼어.’

 도담이가 내 눈물을 닦아주려는 듯 얼굴을 마구 핥았다. 나는 그를 품에 안았다. 따뜻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제일 잘 아는 건 도담이뿐이다. 24시간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았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할까 봐 말하지 못하는 것도 도담이는 가만히 다 들어준다. 속상해하지도, 동정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곁에 있어준다. 내가 장애인이라고 지나치게 배려하려 하지 않고, 거추장스러워하지도 않고 그냥 나로서 받아들여준다. 그래서 안내견이 나는 좋은 거다. 도담이가 온 뒤 그 동안 단단히 엉켜있던 인생 매듭이 술술 풀리는 것 같다. 도담이는 복덩이다.

 그다음 해, 정규직이 되고 팀원들이 말했다. 도담이와 나는 동반 입사라고. 그래서 월급도 두 배 줘야 한다고. 도담이도 사원증 만들어줘야 한다고. 나는 웃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을 텐데. 현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준다는 건 도담이를 소중히 여겨준다는 뜻이니까. 도담이를 팀원으로 받아준다는 의미니까. 지금은 옛 동료가 되어버렸지만 그들의 따뜻한 말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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