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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솜사탕 Jun 28. 2023

이름 붙이는 것에 대한 생각

애칭과 별명이 주는 의미

 인간과 관계를 맺는 모든 것은 생명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름을 갖는다. 책상, 고양이, 바위 등등. 인간에게 발견되면 이름이 생긴다. 게다가 소망이나 평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도 어떻게 보면 인간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인간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대상에 이름 붙이고 싶은 욕구가 있나 보다. 이런 이름표를 붙이려는 본능은 자신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존재, 즉 친밀한 관계 앞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예를 들어 새 식구가 된 강아지에게 이름을 준다든가. 반려동물뿐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자동차에게도 종종 애칭을 붙여 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정말이지 보통 애정이 아니다.

 또한 이름 붙이는 작업에 상당히 진지해지기도 한다. 태어난 아이 이름을 정할 때면 좋은 이름이 있다고 확신하며 작명소를 찾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나 역시 산타에게 받은 강아지 인형 이름을 정하는 데 꽤 긴 시간 고민한 기억이 있다. 게다가 충격적이게도 때로는 전혀 관계없는 단어끼리 연결되기도 한다. 특히 반려동물 이름이 그렇다. 동물병원 대기실에 가면 두부, 콩, 초코, 보리... 시장을 연상케 하는 온갖 먹을 것 이름이 들려온다. 외계인이 보면 참 이상한 모습이 아닐까. 전혀 다르게 생긴 물체가 똑같이 불리니 말이다. 어쨌든 간에 이렇게 인간은 자신과 마음을 주고받는 존재에게 줄 이름을 찾는데 이때가 바로 ‘심리적 가족’ 탄생의 순간이다.

 이름에 상당한 사랑이 담긴 건 틀림없다. 기본적으로 탑재된 이름이 어딘가 부족해서 연인 사이에도 서로만의 애칭이 있고, 친구들끼리도 실제 이름이 아닌 다른 단어로 별명을 붙이거나 본명을 줄여 귀엽게 부르곤 한다.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나 또한 내 안내견을 ‘도담’이라는 진짜 이름 대신 ‘담, 아저씨, 멍멍이...’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걸 깨닫는다. 멀쩡히 이름이 있는데 거기에 또 애칭을 붙이게 되는 심리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 꽤나 흥미로운 발견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렇게 이름 아닌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애칭은 역시 남자친구와 오랜 친구들이었다. 분명한 건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 성인이 되어 인연을 맺은 사람 중 애칭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저장할 때 몰래 내 맘대로 별명을 넣긴 하지만 그 이름으로 직접 상대방을 부른 적은 결코 없다. 게다가 성인이 되어서 붙이는 별명 중 남자친구를 제외하고 긍정적인 의도를 가진 것은 없는 듯하다. 한 번이라도 친구들과 ‘푸념 배틀’을 열었던 사람이라면 금방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은 어른이 되어갈수록 점점 애칭을 사용하지 않으며, 기껏 붙인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타깃이 되는 걸까.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에겐 대체로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덧붙여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애칭을 쓰는 건 ‘아이 같은 짓’, ‘어른이 해선 안 되는 행동’쯤으로 학습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긍정적인 의미로 앙증맞은 애칭을 붙여줄 만큼 상대를 포용할 여유도 없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만 눈에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타인에 대한 심리적 여유의 상실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온갖 폭풍을 겪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되었다는 훌륭한 증거이다. 하지만 어른 갑옷을 입었을 뿐, 완전한 어른이 된 건 아니다. 내면 깊숙이에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무장한 갑옷을 벗어버릴 수 있는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 앞에서는 마구 그걸 드러내는 것이다. 마치 무리를 짓고 떠들어댔던 소년, 소녀 시절처럼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까운, 그 이상으로 밀착된 ‘가족’과 같은 존재에게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니. 역시 어른인 척 살아가는 건 꽤나 쓸쓸한 길인 모양이다. 나이 먹고 만드는 애칭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도 눈물 날 만큼 안타깝다. 상대방의 나쁜 면을 기억하고 그것을 별명으로 삼는 건 유치한 짓이다. 그래도 아무런 이름표도 붙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단 나은 듯하다. 적어도 마음의 순수함은 남아있다는 증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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