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는 그게 진실이었다.
- 이제 갈까?
오랜만에 온 바다가 좋았다. 탁 트인 시원한 바람도 좋았고, 조약돌 사이로 빠져나가는 파도 소리가 내 마음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며 거늘었다.
" 이제 갈까? "
내 말에 남편은 당황했다.
" 2시간을 달려왔는데 벌써 가? "
" 응 이제 됐어. "
" 바다를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
그때는 바다를 보고 싶었다. 파도 소리가 내 마음을 시원하게 가져 갈 것 같아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까지 여기 머물 수 없지 않은가?
집도, 사람도 그리고 물건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 결국 변하는 게 마음이고, 인연이다.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봄날은 간다 영화 중에서-
영화의 한 대사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별로 끝난다. 결국은 변할 수밖에 없는 본질을 역설로 나타낸 대사다. 그래서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그 시절의 인연이 있는 거다. 그때는 그게 소중하고 맞을 수 있다.
매일이 즐거운 아이는 놀고 싶으면 놀이터로 뛰어간다. 그리고 처음 보는 또래와 인사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같이 웃고, 뛰논다. 때로는 집 안까지 데리고 와서 냉장고를 열고 이것저것 꺼내 준다.
" 같은 반 친구니? " 물어보는 내 질문에 아이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이 답한다.
" 이름은 000이고요, 방금 만났어요. 옆에 아파트 사는데 그냥 놀러 왔데요. 애도 축구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 친구 휴대폰에 설치되어 있어요. 게임같이해도 돼요? "
그렇게 오늘 처음 만난 아이는 몇 시간을 놀다 갔다. 이건 지금 아이의 나이 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난 그때만 할 수 있는 아이의 행복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아이는 지금 이 놀이가 소중하고 즐겁고, 지금의 순수한 행복일 수 있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났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만나자 약속했지만 쉽지 않았다. 때로는 이년에 한번, 삼년에 한 번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어릴 때는 매일 붙어 다녔고,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아쉬워서 돌아서면 편지를 적고, 교환일기를 함께 적었던 친구들이다. 그때 친구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마음을 줬었고, 삶의 많은 부분을 함께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우린 함께 일 거라고 믿었고, 우린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게 진심이었고, 그게 맞았다.
그러나 시절의 인연은 나에게 그리고 그에게 다른 인연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의 인연이 맞고, 이제는 흘려보내야 할 때가 된 거다. 집도, 물건도, 사람도 계속될 거라 믿었지만 그때는 맞았지만 놓아 주어야 할 때가 있고, 흘려보내야 할 때가 있는 거다.
이제는 놓아 주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붙잡을 때 생기는 부자연스러움이 날 삐걱대게 만들고, 서로 난처하고 힘들게 만든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흘려갈 때는 흘려가는 대로 그냥 놔두자.
결혼 초 친정엄마는 우리 가정과 같이 시간을 보내길 원했고, 주말만 되면 연락이 왔다. 처음 몇 번은 주말마다 엄마에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러다가는 내 가정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겪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 난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엄마는 그 순간 내 결단을 눈치챘다. 그러나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운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엄마도 6개월 가까이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6개월 뒤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린 다시 만났다. 그리고 엄마가 먼저 입을 똈다.
자식을 키우는 이유는 자식의 독립이야. 나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나도 그 순간이 되니깐 서운하고 힘들더라. 그런데 독립해야지. 이제 너는 네 가정을 이루렴. 나는 내 가정을 살게.
때로는 아프고 망설이게 되고, 원치 않을 때도 있지만 놓아 주어야 할 때는 놓아 주어야 한다. 그렇게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다. 집도 사람도 그리고 물건도 그때는 소중하고 이게 맞을 수가 있다.
그때는 그게 맞는 거고 지금은 이게 맞는 거다.
흘려보내자.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자.
처음 집을 구하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던 시절 그 집은 내게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집을 내어 놓아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이 집이 틀렸던 것도 아니다. 단지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뿐이며, 움켜잡은 손을 풀어 내려놓아야 하는 그 순간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그 시절의 인연을 흘려보낸다. 그리고 나는 다음 삶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그게 우리의 삶인 걸 알기에 이제 더 이상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