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차/볼리비아] 난 다른 얘기가 듣고 싶어~ 차, 소음, 매연 말고~
A.M.7:30
얼른 버스에서 내리라는 요란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우유니에서 밤 10시반 야간버스를 타고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벌써 해가 떠 있었고 나는 이미 라파즈에 도착해 있었다. 장장 9시간을 달려 도착한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 우유니에서 소금사막에 심취하여 3일 내내 수면부족 상태로 여행을 한 덕분에 그 불편하다는 야간버스에서 나는 죽은듯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라파즈는 역시 수도다웠다. 거대한 버스터미널, 도시를 빼곡히 채운 건물들, 수많은 차들과 북적거리는 사람들. 도시 그 자체. 아침 출근시간대여서 더 그랬을까, 라파즈의 첫인상은 소란스러웠다. 라파즈는 무려 평균 고도가 무려 3,600m에 이르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도이다. 한라산(1,950m)보다 거의 2배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셈. 많은 여행자들이 걱정하는 고산병, 나 또한 이에 대비하여 전날 밤 고산병 약을 챙겨 먹었다. 앞선 도시에서 만난 동행들이 라파즈에 머무는 내내 두통을 호소했다고, 고산병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해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다행히 나는 고산병 증상이 전혀 없었다. 야간버스에서 1박을 하고도 오히려 컨디션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이 정도면 고산에서 기운이 더 왕성해지는 고산 체질인가 싶었다.
A.M.7:45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도답게 호스텔을 찾아가는 길부터 급격한 경사로가 등장했다. 경사로를 최대한 피하려고 룸 컨디션 따위는 일절 포기하고 버스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호스텔을 예약했는데도, 급경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 거리며 끌고 올라가는데 길거리 곳곳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하필 내가 도착한 날이 입학식 날인 모양이었다! 여행자 신분으로는 보기 드문 특별한 풍경이었다.
해군학교 앞에서 제복처럼 생긴 교복을 멋있게 차려 입고 자랑스럽게 기념 사진을 찍는 학생들, 부모님 손을 잡고 함께 나와 경사길을 오르는 교복 입은 꼬맹이들, 교문 앞에 서 있는 입학 축하 포토존, 줄 서 있는 학생과 학부모를 한 명씩 교문으로 들여보내는 선생님들... 나는 급경사길 입학식 행렬에서 캐리어를 끌고 있는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라파즈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자연스럽게 도시에 일상에 스며드는 행운을 누리다니!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여행자였다. 입학식 풍경 감상에 정신이 팔려 아주 느릿느릿 급경사길을 오르느라 바위덩어리 같은 캐리어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라파즈의 활기찬 아침이었다.
A.M.8:00
드디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오로지 버스터미널과의 거리 하나만 보고 전날 예약한 호스텔이었다(사실 남은 방이 여기밖에 없었다.). 아침 8시도 안 된 이른 아침인데 방이 텅텅 비어있는 모양인지 호스텔에서 얼리체크인을 해주었다. 온통 짙은 갈색 나무로 도배 된 낡고 낡은 호스텔이었지만 삼각형 모양으로 가운데를 뻥 뚫어버린 독특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낡음을 빈티지로 그럴싸하게 승화시킨 공용 공간도 맘에 들었다. 여행자 친구를 사귀기에도 좋아 보였는데, 시간이 너무 일러서 그런지 나 말고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거의 없었다.
이 거대한 호스텔의 객실은 모두 위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연히 엘레베이터는 없었다. 캐리어 때문에 가장 낮은 층으로 배정해달라고 했는데도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하필이면 층고도 높아서 어찌나 계단이 많은지 아주 애를 먹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건물을 휘감고 있는 나무 복도를 통해 방을 찾아갔다. 걸어다닐 때마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지만, 복도 곳곳에 놓여있지만 아무도 앉지 않을 것 같은 책상과 의자, 길쭉한 나무 창문과 그 사이로 스며든 채광이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아주 오래된 마법학교를 호스텔로 개조한 것 같은 공간이랄까?
낡은 나무 방문이 끼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텅 빈 6인실 여자 도미토리에 배정되었다. 나무 침대, 나무 사물함, 모든 것이 하나같이 삐걱거렸다.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소란스러운 도시의 소음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아니, 창문이 닫혀있었다... 나무 덮개만 열려있을 뿐 창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바깥 소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투명한 창문이었다. 창 밖으로 소음과 매연으로 악명 높은 라파즈가 한눈에 들어왔다.
A.M.9:30
라파즈에 대해서라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수도라는 사실과 고산병 약빨이 안 들어서 며칠 동안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는 동행의 이야기 정도가 전부였다. 라파즈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 단 하루. 하루만에 도시를 정복하려면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다. 일단 라파즈에 뭐가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도미토리 1층 침대를 하나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라파즈 하루 코스' 따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마녀시장? 텔레페리코? 낄리낄리?'
하나 같이 이름부터 흥미로웠다. 일단 구글 지도에 닥치는대로 깃발을 꽂아댔다.
깃발을 몽땅 정복하고 싶은 욕심에 가장 효율적인 여행동선으로 정복계획을 세워보려고 했으나 바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깃발을 꽂는 것 그 이상의 작업을 뇌에서 거부했다. 더 머리를 굴리지 못하도록 뇌가 딴 생각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할 일이 떠올랐다.
'밀린 빨래! 지금 동선 짤 때가 아니지!'
즉흥적인 여행자는 계획이라는 틀에 갇히려는 순간 본능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공용 화장실로 양말 한 뭉탱이를 가져가 세면대에서 한바탕 손빨래를 했다. 어차피 지켜지지 못할 계획, 세워봤자 괜히 기분만 나쁘다. 고로 아예 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침대 나무 난간에 잔뜩 쌓인 먼지를 대충 휴지로 털어내고 양말들을 다닥다닥 붙여 널었다.
빨래 생각을 떨쳐내자 고산병 약이 떠올랐다. 혹시 두통이 올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약을 먹어두어야 했다.
'매번 손톱으로 알약 반씩 쪼개 먹는 거 진짜 귀찮네...'
칼을 찾아 공용 주방으로 올라갔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일단 근처 맛집에서 첫 끼를 때우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찾으려던 칼은 발견하지 못했고, 대신 통유리 창을 통해 라파즈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루프탑 테라스를 발견했다!
명성에 걸맞게, 정말로 도시가 하늘에 맞닿아 있었다. 벽돌색 건물들이 급경사를 따라 구름까지 다닥다닥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라파즈의 대중교통 수단인 케이블카 '텔레페리코'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더 없이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사실 라파즈는 볼리비아에서 페루로 넘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쳐가는 도시 정도였는데, 이제 정말 각 잡고 둘러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칼을 찾아 1층 로비로 내려가 보았다. 칼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신기하게도 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알약을 몽땅 쏟아낸 후 한 알 한 알 커팅식을 진행했다. 남미에 도착한 직후부터 며칠이나 미룬 일을 드디어 처리하다니. 공부하기 싫을 때 책상을 정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답게 호스텔 부엌에 고산병에 좋다는 코카잎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더 이상 여행 동선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오늘은 그냥 발길이 닿는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로 한다. 코카차를 한번 마셔볼까 싶었지만 두통은 커녕 여전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그래도 오늘 내로 깃발을 모조리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는 해야겠지...? 이딴 걸 마실 때가 아니었다. 동선 짜보겠다고 머리를 쥐어짤 시간에 무작정 뛰쳐 나가서 발부터 움직였더라면 벌써 깃발 한두개 쯤은 정복했을 시간이었다.
호스텔에서 분주한 아침을 보내는 동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깃발 중 첫 끼를 때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해보기로 한다.
A.M.11:00
숙소 앞 큰 길을 따라 어마어마한 맛집이라는 첫번째 깃발을 향해 쭉 걸어보기로 했다. 차들이 도로를 꽉 채우고 있었다. 곳곳에서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울렸다. 차들이 내뿜는 검은 매연 때문인지 코가 시큰거렸다. 분명히 아무 생각 없이 직진으로 걷고 있을 뿐인데, 시각과 청각과 후각이 동시에 피곤해졌다. 신호 덕분에 차가 없는 쉬는 시간이 규칙적으로 찾아왔길 망정이지, 오감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뻔 했다. 소란한 도시의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자 감각들이 서서히 마비되면서 불쾌함도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식당이 위치한 좁은 골목으로 빠져 들었다. 이제 좀 도로가 한가해지려나 싶었는데... 가파르게 경사진 좁은 도로 위로 차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차량 행렬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자꾸 보아야 아름답다고 했던가. 어지러운 매력에 빠져드는 데 필요한 시간 약 1시간... 차, 소음,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에 익숙해지면서 골목골목이 조금씩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A.M.11:30
드디어 첫 끼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 온 라파즈 핫플, '파세냐 라 살테냐'. 구글 지도에 나오는 주변 식당 중 평점 높으면 맛집, 검증된 한국인 리뷰가 있으면 대충 핫플로 친다.
볼리비아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음식을 꼽으라면 나는 무조건 '살테냐'를 꼽을 것이다. 엠빠나다에서 변형된 볼리비아의 대표 간식으로, 한국어로 설명하자면 '고기파이'쯤 되겠다. 밀가루 반죽 안에 고기, 야채, 계란 등을 넣고 구운 요리로, 엠빠나다보다 빵이 더 달달하고 바삭하고, 속은 육즙이 가득해 촉촉하다. 속재료에 따라 닭고기, 야채, 매운 맛 등등 종류도 여러가지. 첫 시식이니 가장 기본 맛을 시켰다.
손으로 들고 한 입을 베어 물자마자 난리가 났다. 너무 뜨거웠다. 그리고 화상을 입을 정도로 육즙이 손을 타고 줄줄 흘러 넘쳐 살테냐를 접시에 떨구고 말았다. 어찌나 육즙이 가득하던지 하얀 블라우스가 물들고 바지까지 젖어버렸다. 재앙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거야?????'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옷을 닦고 있는데 누군가 내 테이블로 다가 왔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 두 자리에 덥썩 앉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바로 합석 잘 되는 헌팅 식당인가요? 잘생긴 오빠들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교복 입은 소년과 그의 엄마였다. 살테냐라는 것이 맛있기는 정말 맛있었다. 그들이 주문한 살테냐를 보니 하나 더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하나로는 아쉬운 맛이었다.
우리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주고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대충 대화가 되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가씨, 살테냐는 이렇게 먹는거야"
'이런 방법이! 작은 숟가락을 같이 주는 이유가 있었군!'
그들은 접시에 살테냐를 눕혀 놓고 숟가락으로 딱딱한 빵을 톡톡 깨서 조금씩 파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먹기 편할 수가... 숟가락으로 파 먹다가 육즙이 좀 식으면 손으로 들고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혼자 먹는 살테냐 보다는 역시 합석 해서 함께 먹는 살테냐가 더 맛있었다.
P.M.12:30
커피 한 잔 하기 위해 찾은 카페 'Bronze'. 라파즈를 정복하려면 갈 길이 바빴지만 어쩐지 잠깐 조용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안락한 분위기, 맛있는 커피 냄새. 소란한 라파즈 시내 바이브와는 전혀 딴판인 평화로운 세상이 숨어 있었다. 일본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는데, 손님들의 대부분도 나와 같은 외국인들이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하고 싶은 공간이었다.
2층에 자리를 잡고 여유로운 한때를 만끽했다.
'라파즈에 머무는 시간 단 하루... 이렇게 앉아있을 시간이 없는데... 없는데...'
하지만 분위기에 취해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았다. 카페에서 밀린 글을 쓰고, 케이블카 노선도를 찾아본다는 핑계를 만들어 조금더 죽치고 있기로 했다. 라파즈를 하루만에 정복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이미 물 건너 갔다. 아침부터 한 일이라고는 먹는 것 뿐. 게으른 여행자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각케익까지 추가로 주문하는 사치를 부렸다. 자고로 게으름과 여유로움은 한 끝 차이인 법. 게으름이란 포장하기 나름인 것이다. 나는 라파즈의 아름다운 카페에서 여행을 위한 정비를 마친 것이다. 무려 2시간반 동안.
P.M.15:00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돌아다닐 마음이 생겼다. 과제 제출기한이 닥쳐야만 노트북 뚜껑을 여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목적지는 라파즈의 대표 관광지 마녀시장. 마녀시장까지는 걸어서 대충 20분 거리. 조금 돌아가더라도 일부러 큰 길이 아닌 작은 골목들을 타고 가면 차, 소음, 매연 뒤에 숨겨진 라파즈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소란스럽고 정신 없었던 라파즈의 첫인상 뒤에 숨겨진 조금 한적한 풍경들이 여행자의 발걸음이 자꾸 늦추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가지각색의 자동차들, 마구 녈부러진 전깃줄 뭉치, 오만가지 낙서로 가득한 건물 외벽이 묘하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직접 분필로 그린 입간판에 시선을 빼앗겼다. 근데 하필 카페 이름이 The writer's coffee. 그 아래에는 차마 안 들어가 볼 수가 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Happiness is a cup of COFFEE and a really good BOOK'
마침 커피 한 잔을 2시간반 동안 음미하고 온 행복한 여행자는 홀린 듯 서점에 빨려 들어갔다.
겨우 마녀시장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는데, 가는 길에 또 다시 놀라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구구구구, 퍼덕퍼덕, 온통 비둘기 소리로 가득한 광장이 나왔다. 라파즈에는 차만 유독 많은 것이 아니라 비둘기도 유독 많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징그럽게 많이 모인 비둘기들의 파티 현장이었다. 모두 비행 능력을 상실한 듯 당당히 인간처럼 광장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인간들이 비둘기에게 광장 전체를 내어줘버린 세상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비둘기들이 광장의 중심을 떡하니 지배하고 있었고, 인간들은 모두 변두리로 밀려나 비둘기들의 파티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비둘기 보호 구역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인간들은 행여나 비둘기님들의 통행에 방해가 될까 광장 입장을 자제하는 듯 보였다. 정말 불가피해보이는 소수의 인간들만이 비둘기들을 요리조리 피해 살금살금 광장을 가로질렀다. 인간이 지나가든 말든 비둘기들은 날개를 퍼덕이는 척 조차 하지 않았고 당당히 광장을 활보했다.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길거리 촐리타(Cholita) 패션쇼를 맘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 촐리타는 안데스 지역 원주의 전통의상이다. 풍성한 주름치마 포예라(Pollera), 어깨에 두른 화려한 숄, 길게 땋아내린 머리와 중절모까지. 이 독특하고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 일상을 살아가는 현지인들을 거리 곳곳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촐리타는 이 전통의상을 입은 도시 원주민 여성 그 자체를 일컫기도 하는데, 과거에는 차별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억압에 맞서 싸우는 강인함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라파즈에서는 촐리타들의 레슬링 경기도 열린다고 한다. 거리 곳곳의 촐리타는 그 어떤 관광지보다 볼리비아를 더욱 볼리비아답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상하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지극히 평범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전에 처음 숙소를 나서자마자 내 발길을 멈추게 만든 귀여운 생명체 한 마리. 이미 나보다 한참 먼저 발길을 멈춘 듯 보이는 어떤 아저씨가 사랑에 빠진 눈으로 정신없는 대로변을 배회 중인 아기 고양이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역시 귀여운 것 앞에서는 무장 해제되는 것이 이 세상 공통 법칙이다. 지나가다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한 번씩 멈추고 나와 함께 아기 고양이를 관찰한 볼리비아 행인 1, 2, 3..n이 떠오른다. 차, 소음, 매연 뿐인 볼리비아 체감 온도를 1도씨 높혀주는 따뜻한 장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