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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우유니와 그 후의 일상

[8일차/볼리비아] 소금사막은 환상, 빨래방은 일상

by 도나윤

낭만의 끄트머리


A.M.05:00

환상 속의 그대, 우유니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전날 우유니 사막이 보여 준 소름 돋는 밤하늘과 감동적인 일출에 홀딱 반해버린 나. 그가 남긴 렬한 여운을 잊지 못하고 6시간 만에 또다시 를 만나러 갔다.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환상적인 모습, 나는 홀린 듯 날 했던 벽 3시 출발 스타라이트 + 선라이즈 투어를 한 번 더 신청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니...

그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전날 밤의 황홀함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사막에 입성했는데... 투어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나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더 이상 어제의 우유니가 아니었다. 분명히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투어를 왔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전날만큼 별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겠는데, 불과 하루 만에 우유니 사막에는 한파가 찾아왔다. 전날 밤 별 사진을 찍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서 급하게 우유니 시장에서 삼각대를 사서 다시 별을 보러 왔는데,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삼각대가 서 있지를 못했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에 별들도 흔들렸던 걸까? 별들이 하나같이 흐리멍텅했다.

전날 밤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래서 밤새도록 밖에서 쏟아지는 별을 감상하며 일출을 기다렸는데, 오늘은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도 살을 찢는 듯한 차가운 칼바람 때문에 별구경은커녕 차 안으로 피신을 해야 했다. 거센 바람에 몸이 밀릴 정도였으니 과장 좀 보태서 진짜 날아갈 뻔했다. 바람을 피해 추운(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차 안 몸을 숨기고 얼른 해가 떠오기를 기다렸다. 가 떠야만 비로소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A.M.05:30

우유니 사막이 눈 뜨는 순간

역시나, 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들에게 퇴근 명령을 내 후 게슴츠레 감았던 눈을 떴다. 깜깜했던 지평선이 보랏빛으로 물들면서 조금씩 열리기 시작!

그는 비범한 습으로 밤새 한파에 지쳐 모든 의욕을 상실한 관객들의 시선을 강탈하며 화려한 일출 쇼의 막을 올렸다. 그는 눈꺼풀에 뻘건 분장을 하고 나타났다. 리고는 간밤에 대 이하였던 별들 때문에 잔뜩 실망한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전날보다 훨씬 화려한 데칼코마니 솜씨를 뽐냈다.

원래 해뜨기 전이 가장 아답다 했던가? 그는 점점 불거지더니 해가 뜨는 순간의 풍경화라기보다는 완벽한 대칭을 표현한 추상화에 가까운 자태를 뽐냈다. 전날 아침과는 전혀 다른,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의 일출이다.

아침 해가 우유니 사막에 거의 도착한 모양인지 지평선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이 이래서 생긴 걸까.

우유니 사막 바닥에 깔린 푹신한 구름 위를 걸어 다녔다. 머리털 나고 본 일출 중 가장 특이한 일출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A.M.06:00

이산가족 상봉

꿈같은 풍경 속에 퐁당 빠져있는 나를 깨운 건 드넓은 사막의 고요를 깨고 울려 퍼지는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방금 누가 또 소리 질렀는데?"

우리 투어 일행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도 귀를 기울이게 됐다.

'사막에서도 메아리가 치나?'

누군가 일정한 간격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계속 울려 퍼졌다.

"어어어어언니이이이이이이이!!!"

한국말이었다.

"언니!!!!!!!!!"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였다.

"도-나-언-니-!!!!!!!!!!!!"

'응? 내 이름인 것 같은데...?'

이 광활한 사막에서 나를 알만한 사람이라면, 전날 사막에서 만난 J뿐이었다. 새벽 3시, 같이 투어를 신청했는데 각자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차량으로 끌려가 생이별하게 된 J였다.

"J야!!!!!!!!!!!!!!!"

목소리는 들리는데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뜨기 전에는 어두워서 오직 우리뿐인 줄 알았던 사막 저 끄트머리에 개미떼처럼 다른 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나 여깄어!!!!!!!! 너 어딨어?????? "

나는 무리를 이탈해 소금사막 위에 깔린 구름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나의 위치를 알렸다.

"언니!!!!!!!!!!! 내가 갈게!!!!!!!!!"

그때 개미 떼에서 이탈한 개미 한 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와!!! 찾았다!!!!!!!!"

그렇게 우리는 우유니 사막 한가운데서 다시 재회했다.

우리는 거의 이산가족 상봉급으로 감격하여 서로를 얼싸안고 빙빙 몇 바퀴를 뛰돌았다.

"혹시 언니도 여기 있을까 싶어서 불러봤는데 진짜 있었네!!!"

어떻게 이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소리를 질러서 사람을 찾을 생각을 했을까? 나보다 대충 열 살은 어린 J의 발상에 감동하였다. 우리는 우유니에서의 마지막 낭만을 즐기며 기념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우리 팀에는 나 홀로, 나홀로 여행객이었다. 자기들끼리 사진 찍기도 바쁜 페루 커플과 한국인 친구들 세트에게 번갈아가며 사진을 부탁하는 것도 일이었다. J와는 이미 전날 우유니 데이투어에서 서로의 스냅작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아주 빠르고 능숙하게 포토타임을 마칠 수 있었다. J팀 가이드가 무리를 이탈한 J를 찾으러 온 바람에 우리는 곧 다시 찢어졌다.

"언니!!! 이따 연락할게!!!"

또 안 와 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P.M.6:00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완전히 날이 밝았다. 우유니 사막은 매끄러운 속살을 뽐냈다. 하얀 구름으로 꽉 찬 하늘이 비쳐 우유니 사막은 갓 빙질 청소를 마친 아이스링크장처럼 빤딱거렸다.

진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구름이 핑크빛으로 물들면서 마치 꿈속에 들어온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느낌. 여기가 진짜 현실 세계가 맞을까?

구름은 춤을 추듯 빠르게 움직이며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나갔다. 불과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우유니 사막은 수십 번 의상을 갈아입으며 관객들을 홀렸다.

밤새 차 안에 숨어있었던 우리 팀 일행들은 그 화려한 변신에 모두 넋이 나가 아무도 차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투어 차량은 하나둘씩 가이드의 독촉에 못 이겨 사막을 떠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우리 팀 가이드는 조용히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우리 팀이 투어를 늦게 시작해서 그랬던 건지, 가이드의 열정이 남달랐던 건지, 우리 팀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사막을 지켰다.

가이드는 우리를 사막 한가운데에 일렬로 세워 고 이런저런 포즈들을 학습시켰다. 또 시작되었다. 어제부터 벌써 세 번째 찍고 있는 동영상, 아리엘 매직투어에서는 투어 종료 전에 늘 차를 타고 빙빙 돌며 동영상을 촬영해 준다. 처음에는 우리를 세워놓고 뭘 하는 건지 어리둥절하지만 결과물을 보면 모두가 엄지를 치켜세우게 되어 있다. 여행의 순간에 낭만을 덕지덕지 덧발라 박제시켜 주는 화룡점정 같은 거랄까? 다른 투어사들도 이런 걸 찍어주는지 모르겠지만, 아리엘 매직투어는 이름에 걸맞게 투어 내내 매직 같은 촬영 신기술들을 선보였다. 전날 선셋투어의 결과물은 벼락에 맞서는 우유니의 후예들 같았다면, 오늘은 비로소 우유니 사막의 일출을 보러 온 관광객들답게 촬영되었다.

다시 우유니 시내로 돌아갈 시간, 우리는 투어 차량을 타고 사막을 달렸다. 차창 밖으로 촉촉했던 우유니 사막이 점점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낭만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정말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환상만 품어왔던 우유니 사막,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환상 속의 현실에 발도장을 찍었다. 우유니 사막에서는 종종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몽환적인 시공간, 그곳은 분명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환상이었다.




일상의 초입에서


A.M.08:30

잠들 수 없는 분주한 아침

어느덧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나 우유니 시내에 입성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1시간 정도 쪽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틀째 수면부족 상태지만 더 을 잘 수 없었다. 일단 체크아웃 시간이 1시간을 미뤄 12시였고, 엇보다 빨래 시급했다. 하루 동안 투어 세 탕을 뛰었으니 하루 만에 3일치 옷이 망가져버린 셈이었다. 부 소금물에 쩔어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허연 얼룩 범벅이 된 청바지는 화이트 워싱 데님 같았다. 문제는 당장 오늘 저녁 야간버스를 타고 다음 도시 라파즈로 떠나야 해서, 빨래 말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식을 먹으면서 별 기대 없이 빨래방을 검색해 보았다. 예상을 뒤집고 우유니에 몇 없는 빨래방 중 하나가 숙소 근처 도보거리에 떡하니 위치하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아침에 빨래를 맡겨야 오후에라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A.M.10:00

우유니 빨래방 체험

오픈 시간까지 기다려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한 빨래방 입구. 철창이 내려와 있었다. 역시나,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미여행 중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황하지 말고 무작정 기다리기. 30분쯤 지나 주인이 나타나서 여유롭게 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때는 왜 반쯤 열려 있는 철창 문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왜 문에 붙어있는 Abierto(열림) 표시가 보이지 않았을까. 이래서 선입견이 무서운 것이다. 주인 아주머니가 밖에서 서성이는 나를 발견하고는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에게 오늘 당장 도시를 떠나야 하는 여행자의 다급한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내 빨래부터 초스피드로 진행하면 3시에는 픽업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아날로그식 저울과 아날로그식 장부. 낯설지만 정겨운 풍경이었다. 세상의 모든 빨래방이 코인 빨래방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볼리비아의 일상으로 들어 난생 처음 보는 매달린 저울에 빨래로 가득 찬 검정 비닐 봉다리를 걸었다. 저울 바늘이 획 넘어가 2.5를 살짝 지나쳐 멈췄다. 아주머니는 느릿느릿 정성스럽게 장부에 손글씨를 적어나갔다. 물론 주인 아주머니와의 모든 대화는 100% 번역기에 의지했다. 남미여행에서 영어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말이 안 통해서 손짓, 발짓, 간간이 웃음소리만 오고 가는 침묵의 빨래방 체험. 패트와 매트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다음 남미여행을 위해 스페인어를 배워 보기로 결심했다.


P.M.12:00

빨래 기다리기

숙소에 들어가 소금기를 씻어낸 후 2시간 남짓 수면 보충을 했다. 체크아웃 시간 때문에 더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야간버스에서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테니까. 드디어 우유니 사막 투어라는 오랜 숙원 사업을 해치운 여행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에 들었다. 날씨 걱정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 한 켠이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남미여행 제1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앞으로 남은 여행을 전부 망친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전략적으로 체크아웃 시간까지 꽉꽉 채워 잠을 잔 후 호스텔 로비에서 단장을 시작했다. 나갈 채비를 하면서 우유니에서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면 잘 보냈다고 소문이 날지 머리를 굴려봐야 했다. 분명히 우유니 사막에 3번이나 갔다 왔는데 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제 천둥번개 치는 우유니의 일몰은 봤지만, 맑은 우유니의 일몰은 못 봤잖아?'

일단 일몰도 보고 별도 보는 선셋+스타라이트 투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바리바리 챙겨 선셋투어를 갔다가 곧장 야간버스를 타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야간버스를 놓칠 수도 있다는 약간의 리스크만 감수한다면... 동시에 충분히 매력적인 다른 옵션이 있었다. 숙소 주인 아저씨가 알려 준 고급정보, 오늘은 볼리비아의 종교 기념일이라서 길거리에서 여러 행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J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J는 잠을 더 자야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선셋투어를 포기하고 저녁에 길거리 행사를 구경하기로 했다.



P.M.13:00

우유니 시내 한 바퀴

빨래를 기다리면서 우유니 시내를 탐방했다. 사실 우유니 시내는 너무 작아서 탐방할 것도 없었다. 길거리에서 볼리비아 전통 의상을 구경하는 것이 가장 재밌을 정도였다.

여자들은 교복이라도 맞춰 입은 듯 무릎 아래로 살짝 내려오는 캉캉 치마를 입고 특이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동네에 두발 규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 머리를 엉덩이까지 양갈래로 길게 땋아 내리고 볏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양갈래는 가발인지 진짜 머리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갈했다.

나는 곧 선셋투어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심심했다. 우유니 시내에는 딱히 갈 곳도, 볼 것도 없었다. 주인 아저씨가 말한 종교 행사 같은 건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세계적인 관광지라지만, 이곳엔 그 흔한 스벅 비스무리한 것조차 없다. 우유니에서 현대화(?)된 유일무이한 카페인 라마카페도 하필이면 휴일이었다. 잠시 머물만한 곳을 찾아 이 카페, 저 카페를 들락거려 봤지만, 어디에도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홀짝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우유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아침에 우유니 사막에 다녀온 것이 벌써 오랜 꿈처럼 느껴졌다.

작은 시내 골목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디선가 나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골목 벤치에 앉아있던 우유니의 소녀들이 눈앞을 자꾸 알짱거리는 동양 여자를 신기한 눈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마침 심심하던 참이었다. 아무 말이나 걸어보고 싶었다. 'Hola!'를 외치며 벤치로 다가갔다. 소녀들이 좋아했다(고 믿는다). 미소가 너무 예쁜 아이들이었다. 대화를 시도했다. 이름 묻는 법도 몰라 번역기를 읽었다. 엉망진창인 나의 스페인어가 웃겼는지 소녀들이 낄낄 댔다. 소녀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 세례를 퍼부어서 나는 그만 자리를 떴다. 스페인어를 배워왔더라면...

우유니 시내에서 가장 힙한 구역에 입성했는데 어쩐 일인지 식당들이 텅텅 비어있었다. 나만 빼고 다들 사막에 간 것이 틀림없었다. 또다시 후회가 몰려왔다. 나도 사막에 갔어야 했는데... 무더운 더위에 지친 나는 카페 찾기를 포기하고 파리 날리는 식당 중 한 곳에 들어가 느긋하게 혼밥을 하기로 했다.


P.M.14:00

라마로 만든 피자

나 말고 손님이 딱 두 팀뿐인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리 오래 앉아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을 만한 완벽한 공간이었다. 구글 평점은 테러 수준이었지만,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로컬풍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다.

그 식당 냉장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메시지.

'인생은 짧다. 규칙을 깨라. 용서는 빠르게, 키스는 천천히, 사랑은 진심으로, 웃음을 미친 듯이!'

마음에 들어서 사진까지 찍어놓고 까맣게 잊고 살았다. 왜 이 여행기를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쓰게 됐는지 알겠다. 맞다. 인생은 너무너무 짧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매일 대여섯 시간 자는 것도 사치일 만큼. 사무실 도착 2분 전, 시간을 쪼개서 그날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 더 낭비할 시간이 없다. 고로 나는 어제 퇴근시간을 넘겨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는 잔뜩 성을 낸 무식한 고갱님을 용서하기로 한다. 마침 카페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용서 완료...

남미에 왔으니 귀여운 라마로 만든 피자를 시켰다.

'라마로 만든 피자 중에 가장 매운 걸로 주세요!'

그곳은 정말로 파리가 날리는 식당이었다. 라마피자가 등장하자 숨어있던 파리들이 정신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찌나 심각했는지 냅킨을 펴서 피자 위에 덮어두어야 할 정도였다. 라마피자는 생각보다 고기 비린내도 나지 않고 맛있었다. 양념 빨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라마고기는 어딘가 달콤한 맛이 났다. 참고로 볼리비아에서 라마고기는 장수 음식이라고...

바깥은 너무 더웠다. 휴대폰은 카페를 하도 많이 검색해서 배터리가 나갔다. 빨래가 다 될 때까지 그곳에서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살인적인 사막투어 일정을 소화하느라 밀려버린 글을 끄적이며 시간을 때웠다.


P.M.16:30

빨래를 찾아서

글쓰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빨래방 아주머니한테 사정사정해서 땡겨 놓은 빨래 픽업 시간을 훨씬 넘겨 버리고 말았다. 빨래방 문 닫기 전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어디선가 웅장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숙소 주인 아저씨가 말한 종교 행사인가!!!'

잠시 소리를 따라 샛길로 빠져보니 첫날 본 우유니 오케스트라가 긴 행렬의 사람들 뒤를 따라 북을 치고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었다. 몇몇 관광객들이 오케스트라 행렬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운 좋게 날짜를 잘 잡아서 이런 마을 행사도 구경하게 되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빨래방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오케스트라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몇몇 사람들이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뿔싸. 장례 행렬이었다. 이곳 지역에서는 음악으로 고인을 보내드리는 문화가 있나 보다. 장례 행렬이라고 하기엔 너무 힘찬 음악이 흘러나와서 완전히 착각을 할 뻔했다...

빨래는 역시 전문가에게! 결과물은 상상 이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얼룩덜룩 딱딱하게 굳어버린 옷들이 뽀송뽀송하게 건조되어 정성스럽게 개어져 있었다. 상쾌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갔다. 우유니 시내에서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대략 난감한 상황.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심심한 곳이었다. 우유니에서는 멍을 때리더라도 시내를 벗어나 사막에 나가서 멍을 때리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숙소 로비에서 편히 쉬다 가라는 주인 아저씨의 말씀을 떠올리며 공용 쇼파에 누워 낮잠을 자기로 했다. 사실 로비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그곳은 조식을 먹는 식당이자 체크인을 받는 리셉션이기도 했으니까...




낭만과 일상의 경계에서


P.M.18:30

우유니 시장 구경

해질 무렵, 우유니 사막에서 만나 급 절친이 된 J를 만나러 우유니 시장으로 향했다. 늘따라 유난히 하늘에 구름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이 상태라면 우유니 사막에서는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 수 있을 텐데...


...속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선셋투어를 갔어야 했는데... 일몰을 포기하고 이까짓 시장 바닥 구경을 택하다니... 해가 기울기 시작 시작하자 하늘은 점점 더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의 나에게 화가 났다. 이런 미련한 결정을 내리다니!!! 거센 폭풍처럼 밀려오는 후회 때문에 온 마음이 휘청였다. 숙소 주인 아저씨가 얘기한 길거리 종교 행사 따위는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아저씨가 날짜를 착각한 거 아니야? 나는 후회에 압도당하여 시장을 구경할 의지조차 상실해 버렸다. 시장 입구에서 J를 만났다. J 역시 후회의 파도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했던 우유니 사막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기운으로 터덜터덜 시장에 들어갔다.

역시 별 볼일 없는 시장이었다. 시장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장 구경이 아니라 볼리비아 길거리 패션 구경을 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는 말수가 줄었다. 머릿속이 온통 놓쳐버린 일몰 생각뿐이었으니까. J가 침묵을 깼다.

"언니! 우리 저거 먹어볼래?"

시장 투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나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사탕수수로 만든 주스였다. 사탕수수에서 주스를 짜내는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맛있잖아...? 우유니 사막으로 도망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제서야 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니, 우리 저거도 먹어 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이었다. 지만 길거리에 놓인 테이블 서너 개가 이미 만석인 걸 보니 맛집이 분명해 보였다. 빈자리가 났다. 우리는 주말을 맞아 시장에 놀러 나온 우유니 동네 사람들 틈 사이에 아예 자리를 잡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가족 손님이 먹는 걸 보면서 손으로 쭉 찢어 한 입 먹어 봤다. 눈이 동그래지는 맛이었다! 그냥 밀가루 반죽을 얇게 튀긴 것 같은 이 별거 없는 음식이 그렇게 맛있었다.

"하나 더 주세요!!!"

J와 후회를 반으로 나누고 음식까지 입에 넣어준 후에야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회에 취약한 나란 인간, 오늘도 후회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열 살쯤 어린 J에게.


P.M.19:30

앙증맞은 야경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미끄럼틀

우유니의 야경은 앙증맞다. 야경 스팟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수줍게 조명을 밝힌 작은 교회와 우유니 힙지로의 노란 조명거리가 야경 투어의 전부였다.

우리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시내를 배회했다. 갑자기 J가 무언가 생각난 듯 흥분하며 말했다.
"맞다! 미끄럼틀 타러 가자!!!"
미끄럼틀...? 여행 다니면서 굳이 미끄럼틀을 찾아가 타본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우유니에서는 정말 할 게 없어서 시간이 텅텅 남기 때문에 미끄럼틀 체험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J의 안내를 따라 우유니 놀이터에 입장하였다.

맙소사. 놀이터 미끄럼틀이 아니었다. 아주 거대한 미끄럼틀이었다. 거의 놀이기구 수준이었다. 게다가 엉덩방아를 네 번쯤 찧을 수 있도록 깊은 굴곡까지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우유니에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미끄럼틀을 경험했다. 거의 날아갈 뻔했다. 단연코 우유니 시내에서 가장 재밌는 것을 꼽으라면 이 미끄럼틀이다.

P.M.20:30

소박한 고기파티

우유니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 스테이크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나와 J는 나이 차이를 잊고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다. 우유니에서 J를 만난 건 커다란 행운이었다. 일몰은 놓쳤지만 J와의 추억을 얻었다. 우유니에서의 마지막 날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지루한 일상 속 낭만 찾기 같았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기억되는 하루다.

J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외국에 살고 있는 J를 다시 만나려면 아마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P.M.22:00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 라파즈로!

숙소 주인 아저씨가 불러주신 콜택시를 타고 우유니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이곳엔 우버가 없다.). 우유니에 도착했을 때처럼 다시 야간버스를 타고 우유니를 떠난다. 우유니에서의 3일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야간버스를 타자마자 출국세를 걷었다. 볼리비아 내에서 이동하는데 왜 출국세를 내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우유니에서 잠을 거의 못 잔 덕분에 그 불편한 자세로 나는 곧장 곯아떨어질 수 있었다.

드디어 우유니라는 남미여행의 큰 숙제를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도시로 떠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 라파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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