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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고도 3,600m 도시의 요상한 마녀시장

[9일차/볼리비아] 요상하고 아름다운 도시, 라파즈의 오후

by 도나윤

해발고도 3,600m 도시


P.M.3:00

게으른 행자의 상대성 이론

세상에서 제일 높은 수도, 볼리비아 라파즈에서 허락된 시간 오직 단 하루. 남미 여행객들에게 라파즈란 대개는 볼리비아와 페루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 잠시 스쳐가는 도시 중 하나다. 나 또한 우유니 사막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 후 야간버스를 타고 아침에 라파즈에 입성하였고, 만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페루행 버스를 탈 예정이었다. 아마도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 같은 이 머나먼 도시를 하루 동안 알차게 정복하고 가리라 머리로는 굳게 다짐하였으나, 어쩐지 아침부터 몸뚱이가 말을 듣질 않았다. 만사가 귀찮아 그냥 소에서 송세월을 보낼 뻔했는데, 배꼽시계 덕분에 발고도 3,600m 도시에 무거운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구글 지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높디높은 언덕의 뒷골목, 그곳은 뭐랄까, 마치 시간의 속도가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소처럼 아침을 먹고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고 현지인처럼 로컬 볼리비안 틈 사이에 껴서 깐 빈둥댔을 뿐인데 시간을 보니 어느덧 오후 3시 순간 이동해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마치 누군가 내 시간을 훔쳐가기라도 한 것처럼. 참으로 요상한 일이었다.

'설마... 나 지금 상대성이론 체험한 거니...!'

고도가 높아지면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했던가. 하늘과 맞닿은 도시에 와보니, 그것은 분명 참이었다.

'... 럼 이제 곧 해가 겠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관광을 미룰 수 없었다. 이제는 말 관광객 모드로 전환해야 할 때. 나는 시간에 쫓겨 마침내 그 유명한 '마녀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녀시장이라니, 관광지 이름마저 요상했다.

마녀시장 입구




마녀시장 탐방기


P.M.3:30

21세기에 마녀시장이라뇨

21세기에 마녀시장이 웬 말이냐 싶지만, 이래 봬도 마녀시장은 라파즈 시에서 도시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대표 관광지이다. 마녀시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시장 입구에서부터 마녀들이 하늘을 둥둥 떠다니며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웰컴 투 마녀시장!'

마녀시장은 종의 샤머니즘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장소이다. 안데스의 원주민인 아이마라(Aymara)족은 파차마마(Pachamama)라는 대지의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사 의식을 주관하는 주술사를 야티리(Yatiri)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마을의 전통 치유사이자 영적 상담사이기도 하다. 야티리는 검은 모자를 쓰고 점술을 볼 때 사용하는 코카 잎 담긴 주머니를 메고 다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검은 모자가 '마녀'스러운 뾰족 모자는 아니고 아이마라족 전통 의상인 중절모 형태다.

코카 잎을 뿌려 점술을 보는 야티리

야티리는 코카 잎을 뿌려 점술을 본다. 뿐만 아니라 민간요법으로 고산병 치료도 하고, 악운 제거를 위한 치유 의식도 치르고, 잃어버린 물건 찾기부터 사랑의 마법, 저주의 주술까지 담당(?)한다고 니 거의 마법사 수준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스페인어만 할 줄 알았라면 유 의식이든 사랑의 마법이든 뭐라도 하나 탁했을 텐데 말이다.


P.M.16:00

마녀시장에 가면 ㅁ도 있고...

빵빵거리는 차들로 시끌벅적한 경사로를 걸어 오르다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되나 싶은 생각이 들 즈음 유독 광객들이 몰린 좁은 골목 입구가 나타난다.

'여기가 맞나?' 긴가민가하며 길을 건너자마자, 한 곳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 무리가 보였다.

도대체 뭘 찍고 있나 보니 골목 첫 번째 가게에서부터 기괴한 물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맞아요, 여기! 마녀시장!"

가여운 새끼 라마가 말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넌 왜 거기 매달려 있니...'

마녀시장은 야티리들이 제사를 지낼 때나 길흉을 점칠 때 사용하는 주술용품 등을 판매하는 곳이다. 안데스 물약, 약초, 빗자루, 말린 개구리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는데, 이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자극적인 비주얼의 소유자, 말린 새끼 라마들이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에게 바치는 제물서 볼리비아 가정집 밑에도 묻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잖아...! 가여운 새끼 라마들은 기괴한 장식이 아니라 사고파는 상품었다.

옆에서는 보아하니 각종 약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배가 아픈 사람, 허리가 아픈 사람, 각종 장기들이 그려진 상자들이 층층이 진열되어 있었다. 거기다 가게 입구에 떡하니 마녀 한 명이 서 있었으니 야티리들이 사용한다는 민간요법 약초임에 틀림없었다.


P.M.3:30

길바닥 전시회

실제로 마녀시장은 말린 새끼 라마같이 요상한 품목만을 취급하는 곳은 아니다.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도 많고, 하늘을 뒤덮은 독창적인 공중 장식들과 곳곳에 숨은 화려한 벽화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요상한 물건을 파는 시장에 남미 감성 낭낭한 길거리 예술 전시회가 열린 느낌랄까.

마녀시장의 시그니처는 알록달록한 공중 우산 행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린 우산이 어떤 주술적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예쁘기 때문에 시장 입구서부터 너도나도 사진을 찍는다.

그곳에서 또다시 연예인 체험이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그냥 쏟아지는 시선을, 쇄도하는 사진 요청을 맘껏 즐기기로 한다. 남미 출신으로 보이는 3모녀 여행객의 사진 요청에 따라 자매와 잔뜩 친한 척을 하며 사진을 찍고 인스타 친구가 되었다.

우산뿐만이 아니다. 걷다 보면 하늘에 모빌처럼 매달려있는 각종 참신한 공중 장식들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독창성 100점!'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지 감성 폴폴 풍기며 오로지 이곳에만 존재할 것 같은 자태를 뽐내는 작품들이었다.

한쪽에서는 가여운 새끼 라마를 매달아 놓고 팔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벽에 뜨개질을 하는 귀여운 엄마 라마를 그려 놨다. 이곳에는 벽화가 꽤나 많은데 하나 같이 독특하고 개성이 강하다. '여기 뭐가 있겠어?' 싶은 좁은 골목 구석구석에도 벽화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니 꼭 시간을 갖고 찬찬히 둘러보시길.

남미식 로봇인가요?
이국미 200%
심오한 뜻이 담겨있을 것 같은 벽화

P.M.4:30

남미의 술혼

마녀시장에는 확실히 짙은 예술혼이 묻어 있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구역은 바로 이 소박한 악기거리. 어떻게 악기를 공중에 매달고 벽에 붙여 둘 생각을 했지? 안 그래도 남미여행 중에 영감을 끌어모아 자작곡 하나 쓰고 가자 싶었던 나름 음악인으로서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남미여행 중엔 노래 쓸 여유 따윈 없었다...만, 약 3개월 뒤 한국에서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한 곡을 써냈다고 한다).

마침 오는 길에 마녀시장 길바닥에 서서 누가 보든 말든 홀로 심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여자를 목격했는데,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하고 있어서 버스킹 중인건지, 그냥 심심해서 혼자 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남미의 예술혼이었을까?

기념품으로 우쿨렐레나 사갈까? 잠시 고민하게 만든 악기 가게. 문 앞을 서성이며 상상해 보았다. 우쿨렐레를 사서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아까 그 여자처럼 나홀로 길바닥 콘서트를 연다면...?

이성이 말했다.

'하지만 너의 캐리어는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인 걸...?'

망상에서 벗어나 인적이 드문 어느 작은 골목 구석탱이에 접어들었다. 그곳에 숨어 있던 보석 같은 갤러리! '라파즈'라는 도시의 모습 그 자체를 주제로 하는 어느 작가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다. 응당 여행 중에는 때때로 발걸음을 멈추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한폭의 그림으로 담아주는 것이 예의인데... 여행 드로잉은 일종의 여행 리추얼 같은 것이었다. 또다시 창작욕이 불타올랐다. 당장 이 마녀시장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은데 또다시 이성이 말했다.

'하지만 색연필을 놓고 오지 않았니...?'

그랬다. 하루만에 급하게 짐을 싸서 여행을 오느라 그 리추얼을 깜빡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아쉬운 대로 남미의 예술혼이 담긴 그 작품의 가격을 물었다. 캐리어가 가득 찼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돌덩이처럼 무거운 작품들을 정말 구매할 뻔했다.



P.M.5:30

여기가 환전소가 맞나요

마녀시장을 빠져나와 시장 초입에 위치한 산프란시스코 대성당을 찾았다. 성당을 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남미에서 만난 동행들로부터 이곳이 여행객들 사이에서 환전 성지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볼리비아는 암환율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공식환율이 1달러에 7볼 수준이라면 사설 환전소에서는 당시 1달러에 약 11볼 정도로 훨씬 좋 환율로 환전을 할 수 있다.

환전소를 돌아다니면서 발품을 팔다가 계산기에 가장 높은 숫자를 쳐주는 곳에서 환전을 하면 된다. 만약 어떤 건물 안 버젓한 환전소를 기대했다면 이곳에서는 아마 몇 바퀴 돌아도 환전소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 구역에서는 길거리에 펼쳐진 이 파라솔들이 곧 환전소 간판이다. 나의 경우 산프란시스코 성당에서 큰 길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파라솔 환전소에서 가장 좋은 환율로 환전을 했다. 참고로 작은 돈(10달러, 20달러 등)은 받지 않으시니 큰 돈(100달러 등)을 준비할 것.

이곳에서 동양인은 매우 눈에 띄는 존재이다. 길거리 공연을 하길래 잠시 구경을 하러 관객들 틈 사이로 들어갔다. 곧바로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다. 남미 힙합퍼 포스를 물씬 풍기는 공연자 둘이 나를 지목하며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대화는 이어가고 싶은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

"노 아블르 에스파뇰!!!!!"

영어를 아무리 몰라도 'I can't speak English'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나는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한 마디 외쳐주었다.

"뭐야, 스페인어 하네!" 눈치밥으로 알아들은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관객들의 웃음이 이어졌다.

잠시 상상했다. 이대로 그들에게 호응해주다가 스테이지로 못이긴척 끌려나가 그들과 같이 춤을 추는 장면...

'완전 재밌겠는데?! 어디든 누가 판만 깔아주면 그곳이 곧 무대 아니겠니!...' 그들은 정말 나를 불러낼 기세였다. 너무나 바라던 바였지만 일몰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갈 곳이 있었다. 아쉽지만 "굿바이!!"를 외친 후 어디 가냐고 붙잡는(내 맘대로 해석하기를) 힙합퍼들을 뒤로 하고 관객들 틈 사이를 빠져나왔다.

저멀리 해발고도 3,600m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구름과 맞닿은 마을이, 그 위로는 구름층을 뚫고 우뚝 솟은 설산이 보였다. 이제 차들로 북적이는 라파즈 도심의 복잡한 길거리를 벗어나, 공중 산책을 떠날 차례였다. 이도의 지하철과도 같은, 오로지 이 도시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대중교통 수단인 케이블카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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