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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도시 라파즈, 8할은 야경이요 나머지는 스쳐갔다

[9일차/볼리비아] 마치 한 번도 혼자 라파즈를 여행한 적 없었던 것처럼

by 도나윤

라파즈 공중 산책기 part 2.


나홀로 케이블카 투어 : 일몰 직후편


P.M.19:05

빨간색 케이블카(Línea Roja)를 타고

네 번째 코스 : 16 de Julio역 -> Central역


라파즈의 대중교통인 케이블카를 타면 편안하게 앉아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공중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여행자들에게는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여행 수단이다. 나는 총 다섯 개의 노선을 골라 공중 산책 코스를 짰다. 일몰이 시작될 무렵 네 번째 노선인 빨간색 케이블카에 탔다. 케이블카를 벌써 1시간쯤 탔더니 케이블카에서 보는 풍경들도 슬슬 다 똑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감흥을 잃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할 즈음, 빨간색 케이블카가 귀신처럼 알아채고 갑자기 덜컹거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마주 앉은 승객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빨간색 케이블카는 우리의 관심을 구걸하기라도 하듯 이내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 모드 on'

해발고도 3,600m에 위치한 라파즈의 지형적 특성상 케이블카는 종종 줄 하나에 의지한 아슬아슬한 놀이기구로 변신한다. 이 어마어마한 경사만 놓고 보면 감히 티 익스프레스 느린 버전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사실 케이블카는 생각보다 빠르다. 그래서 재밌다. 다음 급하강 구간이 기다려질 만큼.

두텁게 깔린 구름 때문에 아무래도 케이블카에서 일몰을 보겠다는 낭만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을 빛에 노랗게 물든 몽환적인 구름을 보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자세히 보니 구름 뒤로 보호색을 띈 설산이 감쪽같이 숨어 있었다.

하얀 구름이 눈 행세를 하며 설산을 뒤덮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내려 갔는지 마을에는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쯤 타니 이제 케이블카를 그만 타도 될 것 같은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케이블카를 타야만 했다. 경치에 대한 감흥도, 롤러코스터 같은 스릴도 더 이상 나에게 큰 자극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아니고서야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야경 명소, 킬리킬리 전망대까지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다. 나는 케이블카 투어에 흥미를 잃었다. 여행자로서의 초심을 잃고 말았다. 비로소 케이블카가, 마치 현지인을 대하듯 나에게로 다가와 대중교통 수단이 되었다.

반가운 다음 정차 역이 보였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환승하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빨간색 케이블카를 타러 갈 때만 해도 설레는 마음으로 환승을 기다렸는데 말이다.


P.M.19:20

주황색 케이블카(Línea Naranja)를 타고

다섯 번째 코스 : Central역 -> Periferica역

드디어 마지막 코스, 주황색 케이블카 노선을 탔다. 원래는 Central역에서 동행들을 만나 같이 케이블카를 타고 일몰을 감상한 후, 위험하다고들 하는 킬리킬리 전망대까지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내가 동행들을 다 모아놓고, 나 혼자 늦어서, 홀로 해가 다 지고 난 후에야 주황색 케이블카를 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이 넓은 케이블카를 혼자 전세를 내고 탔다.

어둠이 내린 주택가에 하나둘씩 주황색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파즈는 대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남은 노을 빛이 온 마을을 어두운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혹시 이래서 이 구역 케이블카 노선을 주황색으로 칠한 걸까?

이번에는 급경사를 따라 케이블카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마을은 멀어지고, 집집마다 밝힌 불빛들이 작디 작은 점으로 변해갔다.

마치 하늘에서 미세한 별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온 마을이 은은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온 마을이 순식간에 펄이 잔뜩 달린 검정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은 것 같었다. 이런 장관을 목격하다니! 무려 1시간 30분 동안 케이블카를 타고 여기까지 올라 온 보람이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하늘과 맞닿은 라파즈의 어느 마을에 별들이 몽땅 떨어져 그대로 박혀버린 것 같았다. 나는 라파즈를 별들의 도시라고 부르기로 했다. 라파즈는 낮보다 밤이 100배는 더 아름다운 도시다. 이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려고 아침부터 그렇게 몸이 안 움직였구나... 모든 게으름에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 이 시간에, 나 하나뿐인 케이블카 안에서, 라파즈에 별빛이 번져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 보려고, 그렇게 빈둥거리다 이렇게 늦게 여기에 오게 됐나 보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더라면 이곳을 너무 일찍 지나쳐버렸을 테고, 낙하한 별들의 마을은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별들의 도시


P.M.19:30

하나 착착 되는 일은 없지만...

드디어 나홀로 케이블카 투어가 끝났다. 이제 나홀로 킬리킬리 전망대를 찾아갈 차례. 택시를 타려면 케이블카 역을 빠져 나가야 하는데, 역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따. 게다가, 문이란 문은 다 잠겨 있었다. 역에 갇혔다... 킬리킬리 전망대로 먼저 올려 보낸 동행들과, 그래도 스쳐가는 인연인데, 거기서 만나 짧게 인사라도 나눠야 하는데 말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나를 구출해 줄 사람을 찾아 역 안을 헤집고 다녔다.

우연히 마주친 직원 한 명, 그에게 '킬리킬리'와 '택시' 두 단어만으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잠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역 앞의 내리막길을 같이 내려가더니 좁은 도로가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마을의 시장 골목 같은 거리였다. 그가 내뱉는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여기서 택시를 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아, 이것이 바로 남미 특유의 따뜻함이다. 그와 손으로 인사를 나누고 곧장 우버를 불렀다. 생각보다 금방 우버가 잡혔다. 한시름 놓고 주변을 돌아보니 머리 위로 케이블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별들의 마을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와, 이게 낭만이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버 기사님이 갑자기 운행을 취소했다. 동행들이 떠나기 전에 킬리킬리 전망대에 도착해야 하는데...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주변에 운행중인 차량이 없는지 우버는 10분이 넘도록 잡히지 않았다. 우버가 오늘 안에 안 잡히면 어쩌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기다림이 길어지니 겁대가리 상실한 나에게도 약간의 두려움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킬리킬리 전망대는 다들 혼자는 위험하다고 너도나도 동행을 구해서 가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동행들에게 카톡을 남겼다.

'저 아직도 우버 잡는 중인데요... 혹시 제가 킬리킬리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디다 신고만 좀 해주세요...'

동행들은 곧바로 우버가 잡혔다고 했는데, 뭐 하나 착착 진행되는 것이 없는 이상한 날이었다. 짜증이 올라올 때 황홀한 별빛들이 나를 달래주었다.

'만약 우버가 바로 잡혔다면 이 아름다운 마을을 넋 놓고 바라볼 기회도 없었을거야...!'


P.M.20:00

킬리킬리 망대

새로운 우버 기사님을 찾기까지가 오래 걸려서 그렇지, Periferica역에서 킬리킬리 전망대까지는 우버를 타고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혼자 가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킬리킬리 전망대. 만약 우버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따뜻한 세상에 대한 믿음만 일시적으로 장착할 수 있다면, 이곳은 결코 혼자가기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물론 전망대에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있다. 산책나온 마을 사람 반, 다국적 관광객 반이다. 사실 동행을 구해야 하는 이유는 치안 보다는 사진 때문이 더 클 것이다.

공기 중에 익숙하게 울려퍼지는 한국어를 따라 갔다. 다행히 그들이 떠나기 전에 킬리킬리 전망대에 도착했구나!

드디어 동행들을 접선했다. '안녕하세요!'를 외치기 이전에 사죄의 말씀부터 올렸다.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다음 일정 때문에 막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만나서 다행이라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일단 사진부터 찍어주겠다며 나를 포토스팟으로 인도했다.

"와!!!!!!"

노래가 들려왔다. 별빛이 내린다~ 샤라랄라라라라~ 아까 맛보기로 살짝 본 별들의 마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곳이야말로 진짜 별 찬지였다. 그들은 숙련된 솜씨로 불과 몇 분만에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세 명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쌓은 듯한 노하우가 담겨 있었다. 역시 사진은 한국인 여행자에게 부탁해야 한다. 그들은 나에게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보라고 했다. 이 또한 그들이 불과 얼마 전 이 자리에서 연마한 포즈들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카메라로는 별들의 도시에 깔린 별빛의 반짝임은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담을 수 없었다.

별들의 도시를 원없이 구경했다. 온 마을에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별들이 무수히 많이 박혀 있었다. 머릿속에 또 이상한 이야기 주머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그냥 그럴듯 하게 짧은 동화라고 치자. 이곳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그래서 별들은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서 출근 준비를 한다. 이미 충분히 깜깜한 것 같은데 하늘에 별이 하나도 없다. 아마 별들도 나처럼 게을러 터져서 지상 마을에 누워서 빈둥대다가, 나처럼 지각을 한 모양이다. 어쩌면 단체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려서 아무도 출근을 안 할 지도 모른다. 간혹 그런 날이 있다. 하늘이 무지하게 맑은데 이상하게도 별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날. 그날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인 것이지!

달과 별이 동시에 떴다고 우겨 봐도 될까. 여행을 다니다보면 주택가의 밤은 사실 흔히 보는 야경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킬리킬리 전망대에서 보는 야경은 좀 다르다. 엄청난 경사를 따라 층층이 쌓인 불빛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정말 차원이 다른 황홀함을 선사한다.

소주 한 잔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포장마차 비주얼의 작은 노점이 마지막 낭만을 장식했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마주친 이 낭만 넘치는 장면이 순식간에 나를 감성충으로 만든다. 대지각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킬리킬리 전망대까지 꾸역꾸역 올라와 보길 정말 잘했다. 이 어마무시한 야경을 놓쳤으면, 억울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과장 좀 보태서, 라파즈는 야경이 8할이다.


그리고 나머지 2할은, 식상하지만 사람이다. 분명 하루종일 혼자 돌아다녔는데, 야경이 미처 다 채우지 못하고 남겨 둔 라파즈 기억 저장 공간을 그곳에서 잠깐 스쳐간 사람들이 가득 채워버렸다. 이른 아침 버스터미널 뒷 골목에서 들뜬 마음으로 교복을 입고 입학식 사진을 찍던 남학생, 볼리비아 국민간식 살테냐 식당에서 나에게 합석해서 먹는 법을 알려 준 엄마와 아들, 마녀시장에서 나랑 계속 마주쳐서 서로 사진을 백 장쯤 부탁했던 여행객 커플, 케이블카 역에서 나를 구출해 준 직원, 그리고 우연의 우연이 겹쳐 한 날 한 시에 킬리킬리 전망대에서 모인 한국인 동행들. 고된 하루 끝에 그들을 만나서 어찌나 반가웠는지, 하루종일 혼자 돌아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외로움이 조금 스며들었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터져나오는 감탄을 잠시나마 함께 나눈 그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킬리킬리 전망대가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홀로 여행의 최후


P.M.21:00

세상 어딘가

킬리킬리 전망대에서 만난 동행과 택시를 함께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야간버스를 타고 다음 도시로 넘어간다고 했다. 기사님께 그의 목적지인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에 마녀시장을 지나갈 테니 나를 그쪽에 내려달라고 부탁드렸다. 허나, 기사님은 곧장 버스터미널로 직행하셨다. 기사님과 100% 번역기로 소통하다보니 대화가 꼬인 모양이었다. 번역기를 몇 번 주고 받고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기사님이 공짜로 나를 마녀시장까지 태워다 주셨다. 아, 이게 바로 남미 특유의 따뜻함이다.

마녀시장을 다시 찾은 것은 라파즈 카페 중 가장 유명한 '델 문도(Del Mundo)'에 가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곳에 비빔밥을 판다고 하여 빨간 음식을 보충하러 왔다. 밥을 기다리면서 카페 내부를 구경했다. '델 문도'는 스페인어로 '세상 어딘가'라는 뜻이라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벽마다 대륙 명이 쓰여져 있다거나, 세계 각국의 여행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거나, 여행을 테마로 공간을 꾸며놨다. 의식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여행으로 향했다. 여행? 여행... 여행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금 세상 어딘가에 와 있다. 그동안 참 열심히 세상 어딘가로 여행을 다녔다. 어느 시점부턴가는 여행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그냥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다.


P.M.21:30

8할이 나홀로 여행

나의 여행 역사를 돌이켜보면, 8할은 나홀로 여행이었다. 사실 나홀로 여행에는 도가 텄다. 하루 전에 비행기표를 끊고 남미여행을 왔듯이, 그냥 내킬 때 바로 비행기표 끊고 여행을 가려면 혼자 훌쩍 떠나는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직장인 신분이라면 이렇게 2주 이상의 여행을 위해 기꺼이 연차를 소진할 수 있는, 비행 시간만 20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을 위해 체력을 갈아 넣을 수 있는 노동자 동지를 찾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이번에도 혼자 남미에 왔다. 유일하게 밟아보지 못한 대륙이었던 남미에도 이제 발도장을 찍었으니 아마도 당분간은 훌쩍 떠나고픈 여행 욕구가 잠잠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나홀로 여행들이 마치 누군가와 함께 다녔던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여행은 사람이다. 잠깐 스쳐갈지언정 결국 사람이다. 혼자 하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결국 사람만 남는다. 여행 중 만난 수많은 사람들. 높은 확률로 영원히 다시 마주칠 일 없을 테지만, 마주친다 해도 서로 몰라보고 그냥 스쳐지나 가겠지만,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 속에 함께였던 그들의 존재 그 자체는 더욱 생생해진다. 맛집, 경치 등 다른 기억들은 점점 빛이 바래는데, 사람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색깔을 유지한다. 옷깃만 살짝 스쳤어도 말이다.

그렇게 여행 중 누군가와 함께 했던 잠깐의 순간들만 줄줄이 떠오르다가, 영화 속 장면처럼 하나로 이어져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어느 시점부터는 마치 그것이 여행의 전부였던 것처럼 여겨진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노상 와인 파티를 함께 했던 사람들, 바르셀로나 게스트 하우스에서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사람들, 타이페이 클럽에서 함께 춤을 췄던 사람들, 레이캬비크에서 함께 서커스 훈련을 했던 사람들... 분명 그때는 전부 혼자 떠난 여행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전부 누군가와 함께 했던 여행처럼 느껴진다.

하루종일 혼자 라파즈를 돌아다니긴 했지만, 마치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잠깐 스쳐 지나간 사람들, 이상하게 그 사람들과 함께 라파즈를 여행한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와 함께 입학식 아침 풍경을 구경하고, 누군가와 함께 점심으로 살테냐를 먹고, 누군가와 함께 마녀시장을 구경하고, 누군가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누군가와 함께 킬리킬리 전망대를 다녀온 것 같다.

마치 한 번도 혼자 라파즈를 여행한 적 없었던 것처럼.

한참을 기다린 음식이 나왔다. 라파즈에서의 최후의 만찬은 비빔밥이다. 빨간 음식을 보충할 때가 됐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2층 짜리 카페에 나 말고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혼밥이지!그러나 그것은 비빔밥은 아니었다. 비빔밥에서 영감을 받아 볼리비아 식으로 재창조한 음식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비빔밥스럽게 먹고 싶어서 그곳의 직원에게 세번쯤 고추장 리필을 요청했다. 그래도 기대했던 빨간 맛이 나진 않았다. 그는 남미 특유의 따뜻함을 지닌 친절한 직원이었다. 나는 남미 사람들이, 최소한 내가 만난 사람들이 풍긴 그 따스한 기운이 너무 좋았다. 이 낯선 도시가, 낯선 카페가 내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마법이다.

숙소로 돌아가려니 아까는 그렇게 안 잡히던 우버가 금방 잡혔다. 세상 일이 원래 다 그렇지... 나 혼자 뿐이었던 6인실 숙소에는 어떤 여자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내 맞은편 침대가 찼다. 아침에 체크인 했을 땐 며칠간 손님이 없었던 것처럼 냉기가 흘렀던 방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아침에는 나무침대 소리가 그렇게 요란하게 삐걱거렸는데 더 이상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잘 준비를 마친 그녀와 나눈 짧은 몇 마디의 대화와 나긋나긋한 목소리 톤이 기억난다. 라파즈에서의 첫 날 밤이자 마지막 날 밤도 나는 결국 누군가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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