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차/볼리비아] 오래된 미래도시, 라파즈를 여행하는 방법
해발고도 3,600m에 위치한 볼리비아의 행정수도 라파즈, 그곳의 풍경은 '오래된 미래도시' 같은 인상을 풍겼다(참고로 볼리비아는 수도가 2개다. 헌법상 수도인 사법수도 수크레가 따로 있다.). 지상에서는 도로 위에 갇힌 올드카들이 쾌쾌한 매연을 내뿜으며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려 대고 있었고, 공중에서는 빨주노초파남보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케이블카가 일정한 속도로 우아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미래도시를 상상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하늘을 나는 자동차처럼. 도대체 줄지어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케이블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것은 흔한 여행지의 흔한 관광용 케이블카가 아니다. 이것은 특별한 도시의 특별한 출퇴근용 케이블카다. 라파즈에는 지하철이 없다. 지하철 대신 이 케이블카를 탄다. 라파즈에서는 이 케이블카에 색색깔의 아기자기한 옷을 입혀놓고 '미 텔레페리코(Mi Teleférico)'라는, 번역하면 '나의 케이블카(my cable car)'쯤 되는 앙증맞은 이름까지 붙여놓았다.
케이블카는 2014년에 개통되어 현재 무려 11개의 노선이 존재한다. 당연히 환승도 가능하다. 7가지 무지개 색깔로도 부족해 은색, 갈색까지 그려 놓은 케이블카 노선도. 지하철 노선도를 쏙 빼닮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라는 유일무이한 수식어의 이면에는 한라산 정상(2,000m)보다 대충 두 배쯤 더 높은 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도시를 일궈 낸 어마어마한 피땀눈물이 묻어 있을 것이다. 어찌 한라산을 2개쯤 쌓아 놓은 곳에서 땅을 파내고 지하철을 뚫을 수 있었겠는가. 이곳의 지형은 언덕도 많은 데다가 깊은 분지 형태라서 지역별로 고도차도 심하다. 라파즈의 중심지는 해발고도 3,600m인데 그 옆에 붙어있는 위성도시 엘알토는 무려 4,100m라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주 당연하게도 지하철란 도저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 케이블카가 이 두 도시 사이를 오고 간다. 가뜩이나 교통 정체가 심각한 이 도시에 케이블카가 없던 시절에는 도대체 어떻게들 이동을 했던 걸까.
P.M.17:50
마녀시장을 너무 오래 구경한 탓에 일몰까지 남은 시간이 고작 1시간에 불과했다. 큰일이었다. 나름 각각의 뷰가 있다는 케이블카 노선을 5개쯤 체험하면서 공중에서 대낮의 라파즈를 한 바퀴 여유롭게 돌아보려고 했는데, 벌써 해가 슬슬 기울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약 1시간 뒤 어느 케이블카역에서 만나기로 한 이들이었다. 이대로라면 높은 확률로 지각할 것이 뻔했다. 라파즈에는 '킬리킬리 전망대'라는 어마어마한 야경 명소가 있다. 그곳까지 올라가는 길이 워낙 어두워서 혼자는 위험하다고들 하여, 대개 한국인 남미 여행객들은 동행을 구해서 같이 택시를 탄다. 나 또한 당일에 모집 글을 올려 이미 3명의 파티원들을 구하고 접선 시간과 장소까지 공지한 후였다. 심지어 우리는 야경 명소로 가기 전에 케이블카로 2정거장을 함께 이동하며 일몰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내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대지각 위기에 놓이다니. 시간을 늦출 수도 없었다. 일몰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방법이 없었다. 축지법을 써서라도 1시간 안에 그곳에 도착하는 수밖에. 나는 가장 가까운 케이블카역으로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고산 지대에서는 소매치기를 당해도 절대 잡으러 뛰어가지 말라고 했거늘, 소매치기 잡다가 심장이 먼저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늘, 나는 달려야만 했다. 케이블카역까지 도보 15분, 일단 그 시간부터 줄여야만 했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면 이렇게 달릴 일도 없었을테 텐데.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여행마저 벼락치기를 하고 있다니. 한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선천적 게으름과 후천적 부지런함의 콜라보로 이런 일상적인 달리기에는 도가 텄다. 그렇지만 남미까지 와서도 한결같이 시간에 쫓겨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여행을 일상처럼'하는 법이라고 우겨 봐도 될까.
그 와중에 고산지대에서 지치지도 않고 쉼 없이 달리고 있는 나... 마침내 케이블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출근길 지각을 면하려고 전력 질주하며 단련된 달리기 실력이 마침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나는 역시 고산 체질이었다. 여행 중 만난 누군가는 라파즈에서 고산병 때문에 며칠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도 했는데, 나는 두통은 커녕 달리면서 특별히 더 숨이 많이 차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예상보다 빨리 El Prado 케이블카역에 도착했다.
P.M.18:00
티켓 자판기를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거친 숨을 내쉬며 티켓창구로 직행했다. 직원에게 노선도를 보여주며 손으로 이야기했다. 동그랗게 이어진 5개의 노선을 차례로 갈아타면서 Periferica역까지 갈 거라고. 그에게 소요시간을 물으니 대충 1시간쯤 걸릴 거라고 했다. 여전히 아슬아슬했다. 그가 건네 준 종이 티켓을 찍고 서둘러 개찰구를 통과했다.
케이블카 이용법은 지하철과 매우 흡사했다. 지하철을 타듯이 일단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케이블카역 승강장으로 들어간다. 노란 선 안에 줄을 서서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오는 케이블카에 차례대로 탑승한다. 케이블카 안에는 10~12명 남짓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는데, 아무래도 케이블카에 수용인원 제한이 있다보니 역무원이 승객들 한 명 한 명 탑승을 도와준다는 점이 지하철과의 유일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P.M.18:02
Prado역 -> Del Poeta역
드디어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외국인 관광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 누구도 유리창에 바짝 붙어 풍경을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지 않았다. 케이블카 내부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시간을 보건대 아마도 나만 빼고 모두 퇴근러들인 것 같았다. 갑자기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적막 속 나홀로 케이블카 투어가 시작됐다. 하늘색, 노란색, 은색, 빨간색, 주황색 케이블카를 차례로 타고 라파즈를 감상하다보면 어느덧 킬리킬리 전망대 근처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라파즈의 케이블카는 각 노선별로 나름 특징적인 뷰를 가지고 있다. 라파즈 시내 중심부를 지나가는 파란색 노선에서는 도심의 높은 건물들과 산지 지형 곳곳에 빽빽이 자리잡은 알록달록한 주택들을 동시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아마도 라파즈가 가진 도시적인 모습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P.M.18:15
Del Poeta역 -> Mirador역
Del Poeta 역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전부 내리기 시작했다. 노선도 상으로는 분명 다음 역에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현지인들에게 휩쓸려 케이블카에서 따라 내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지만 눈치껏 다수를 따라 일단 그 자리에서 기다려 보았다. 지금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혹시나 여기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게 된다면? 나는 결국 동행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나를 기다렸다가는 그들의 여행까지 망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미 글러먹은 것 같으니 여러분들끼리 먼저 일몰을 보시고 전망대로 출발하시리고... 나는 목숨을 걸고 킬리킬리 전망대까지 혼자 알아서 찾아가 볼 테니 그곳에서 뵙자고... 그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나는 그냥 하루만 따뜻한 세상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다 사람 사는 동네인 걸... 마침내 새로운 케이블카가 들어왔다. 다수를 따라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제대로 잘 탄 건지는 다음 역의 이름이 알려줄지어니 일단 직감을 따르기로 한다.
다행히 기다렸던 역 이름이 나왔다.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라파즈 공중 관광에 몰입할 수 있었다. 마침 눈 앞에 외계 행성에 온 것 같은 독특한 지형과 그 사이사이를 가득 채운 벽돌색 주택들이 만들어낸 드라마틱한 뷰가 펼쳐졌다. 라파즈 중심부와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케이블카가 건물 꼭대기에 닿을듯 말듯한 저공 비행을 뽐내기 시작했다. 마치 착륙하는 비행기에서처럼 어느 마을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편하게, 빠르게 동네 한 바퀴를 돌 수 있다니. 라파즈에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하는 여행자에게 케이블카는 시간적으로 가성비가 엄청난 여행 수단이다.
케이블카가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좌측으로 분지 지형의 경사를 따라 옹기종기 모인 벽돌 주택들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구름도 산 등성이를 따라 우리랑 같이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듯한 완벽한 순간, 마치 엽서 같은 풍경이었다.
노란색 케이블카는 잠시도 심심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이번에는 벽돌 주택 옥상에 널린 빨래감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마을을 스쳐갔다. 아마도 라파즈의 고도차를 가장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노선이 아닐까.
이어지는 하이라이트는 바로 롤러코스터 구간! 급격한 경사로를 따라 케이블카들이 줄지어 급 하강하기 시작했다.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었다. 놀이기구 기능까지 탑재한 이 케이블카는 정말 혁명적인 여행 수단이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소름 돋는 파노라마 뷰는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하늘, 구름, 산, 그리고 점묘화처럼 촘촘히 박힌 집들까지, 그냥 예술 그 자체였다. 그 위로 줄지어 내려가는 노란 케이블카 행렬은 또 어찌나 귀여운지, 별 기대 없이 들른 환승 도시에서 갑자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라파즈에 오길 참 잘했다. 케이블카를 타러 오길 참 잘했다.
'이게 바로 낭만 아니겠니!!!'
노란색 노선의 끝에는 전망 좋은 치킨 집이 기다리고 있다. 치킨 집은 어마어마한 파노라마 뷰를 자랑한다.
시간만 있었으면 여기서 대자연을 감상하며 치킨 한 마리 뜯고 갔을 텐데. 일몰은 다가오고 아직 갈 길은 멀었고. 치킨집 통유리 창에 바싹 붙어 서둘러 풍경을 눈에 담았다.
P.M.18:50
Mirador역 -> 16 de Julio역
세 번째 투어코스는 은색 노선. 은색 케이블카는 도시의 끝자락, 즉 분지의 경계를 따라 이동한다. 오른쪽으로는 무수히 많은 건물들이 점처럼 찍혀있는 움푹 패인 깊은 분지가, 왼쪽으로는 이보다 훨-씬 높은 평평한 고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 노선의 또다른 장관은 저멀리 보이는 안데스 산맥의 설산이다. 설산이 구름에 가려져서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이 노선 구간에서는 사진이 별로 없다. 케이블카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면 케이블카 진행 방향 쪽에 앉아야 오히려 역방향이더라도 고개만 돌려 경치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유리창에 카메라를 대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급한 마음에 남아 있는 자리에 그냥 앉았는데 정방향이라 편하긴 했지만 정면에 마주보고 앉은 사람들이 경치를 가려서(+ 그들을 면전에 두고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미안해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만약 케이블카를 잘못 탔다면? 그냥 내려서 다음 케이블카를 타면 된다. 킬리킬리 전망대에서 동행들에게 합류하려면 더 지체할 시간이 없지만, 케이블카 경치를 놓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여차하면 야경 좀 혼자 보면 어때...? 설마 별 일 있겠어...?'
라파즈는 아마도 다시 올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말인즉슨 이 케이블카도 높은 확률로 마지막일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1정거장만 이동한 후 내리기로 빠른 의사결정을 내렸다.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줄을 섰다. 다음 케이블카도 진행 방향쪽은 만석이었다. 나는 다다음 케이블카에서야 겨우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케이블카는 역시 1열에서 경치를 구경해야 제 맛이다. 깊은 분지를 떠나 고지대 위를 날아가는 은색 케이블카. 확실히 외곽으로 빠지니 느낌이 달랐다. 라파즈와 엘알토의 급격한 고도차가 한눈에 보였다. 바로 옆에 붙은 두 곳이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은색 노선의 종착역인 16 de Julio역에는 라파즈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인 '엘 알토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다. 이 전망대는 무려 해발고도 4,100m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이 전망대까지 가는 그 쉬운 길을 찾지 못해 물어 물어 겨우 전망대에 도착했다. 사실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인데, 마음이 급하다 보니 다짜고짜 아무나 붙잡고 묻기 시작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엘 알토 전망대에 가려면 케이블카 역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역과 이어진 통로 같은 건 없다.
전망대 어딘가에서 사나운 개들이 쉬지도 않고 미친듯이 짖어대서 모두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눈 앞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고요한 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노을 빛이 물들어 밝게 빛나는 구름과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 마을의 대비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 요상한 전망대를 굳이 묘사하자면 '평화로운 소음 속에서 사나운 고요를 만끽하는 곳' 정도 되겠다. 사나운 개들이 그곳에 사는 아이들이라면 말이다. 사실 케이블카에서 이미 장관을 맘껏 구경하고 온 사람이라면 엘 알토 전망대의 풍경이 크게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서둘러 역 안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구름이 더 붉게 물들기 전에, 어서 세 번째 환승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