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은 존중으로 이어져야 한다
좋은 마음도 윤리 위에 있어야 진짜 애정입니다.
요즘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양한 창작물을 마주친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짧은 시 한 줄, 유튜브 영상에 흐르는 인상적인 문장, 웹툰 속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 하나.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며 우리는 말한다.
“와, 이거 좋다.”
그리고 이어지는 손가락의 반사적 움직임. 저장, 복사, 캡처. 그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좋아서 가져왔어요. 그게 죄인가요?”
이 질문은 언뜻 무해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실은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감탄과 공유의 마음은 정말로 창작자를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감동을 나누고자 했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창작세계를 무단으로 가져온 건 아니었을까?
창작물은 단순히 이미지나 텍스트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번의 퇴고와 밤을 새운 고민, 고통 속에서 빚어진 한 사람의 ‘삶’이다.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수십 번을 지우고, 선 하나를 그리기 위해 며칠을 붙잡는다.
그 과정을 전부 알거나 이해하긴 어렵다. 하지만 잘 모른다는 이유로 함부로 다가가도 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은 노동이며 동시에 존재다. 그 존재를 허락 없이 가져오는 것은 단순한 무례를 넘어선다. 그것은 ‘도둑질’이다.
“그림이 예뻐서 배경화면으로 썼어요.”
“영상의 음악이 좋아서 편집에 썼어요.”
“문장이 좋아서 소개글에 넣었어요.”
“인터넷에 떠돌던 거라 원작자를 몰라요.”
익숙한 말들이지만, 그 무심한 언어들이야말로 창작자를 가장 아프게 만든다. ‘좋아서’ 가져왔다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결여된 말이다. 진심 어린 감동이라면 그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윤리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감동은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 좋아하는 마음은 존중으로 이어져야 한다.
디지털 시대는 공유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용이 쉬워진 시대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섬세하게 의식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혹시 내가 누군가의 창작품을 훔친 건 아닐까?”
좋아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이 정도는 다들 하니까’라는 안일함이 결국 창작자의 이름을 지우고 권리를 빼앗는다. 창작자는 대단한 칭찬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세계가 존중받기를 바랄 뿐이다. 그 세계는 한 편의 시일 수도 있고, 짧은 문장이며, 오래 고민한 하나의 선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는 고유한 이름과 권리가 있다.
실제로 많은 창작자들이 무단 도용과 표절로 창작을 멈추기도 한다. 어느 일러스트 작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배경화면’으로 무단 공유되는 모습을 보고 SNS를 닫았다. 짧은 시 한 줄이 수십 개 계정에 무단 전재된 어느 작가는 “나를 지우고 내 문장만 살아남았다”라고 이야기했다. 창작물의 생존은 감동이 아니라 존중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종종 창작물이 인터넷에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그 착각이 누군가의 존재와 권리를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유와 도용은 엄연히 다르며 그 경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민의 윤리다.
‘좋아서 가져왔다’는 말이, 누군가의 창작을 훔치는 정당화가 되어선 안 된다. 좋은 것을 나누고 싶다면, 가장 먼저 그 아름다움을 만든 이의 이름을 기억할 것. 감동은 공유될 수 있지만, 권리는 결코 함부로 나눌 수 없다.
창작자들이 계속해서 쓰고 그리고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은 ‘좋아한다’는 마음을 존중의 태도로 실천하는 사회에서 비롯된다.
그 시작은 아주 작고 간단한 예의다. 출처를 밝히는 일. 허락을 구하는 일. 이름을 기억하는 일. 그 모든 사소한 예의가 창작자와 우리 모두를 지키는 저작권의 윤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