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답답할 때 알아서 나갈게요
종종 이렇게 묻고 싶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
외출보다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집순이'. 그게 바로 나이다.
내 방에서 누구보다 평화롭고 의미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편이며 자주 깊은 만족감을 얻는다. 여행은 다녀야 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행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 집에서 편안하게 책 읽는 걸 선호하는 나이다. (물론 마음이 내키면 여행도 간다.)
나에게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내가 구축한 세계이자 사색과 창조, 그리고 온전한 휴식이 가능한 성역이다.
햇살 좋은 오후,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길 때 느끼는 지적인 충만함이 좋다. 좋아하는 그린티 라테를 테이크 아웃하여 잔에 담아 홈카페 분위기를 즐길 때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사랑한다.
유튜브에서 자기 계발 영상을 보며 나를 채워나갈 때의 배움의 기쁨과 요가 매트 위에서 몸을 움직이며 하루의 긴장을 풀어낼 때의 개운함도 좋아한다. 폼롤러로 뭉친 근육을 풀거나 스텝퍼 위에서 땀 흘릴 때 느끼는 상쾌한 활력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정 답답하면 앞마당에 나가 꽃을 구경한다.
이 모든 순간들이 나의 '집순이' 삶을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들이다.
나에게는 그 어떤 외부 활동보다 크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가져다준다. 나는 집순이고 내 집에서 미치도록 행복하다. 그런데 왜 자꾸 종종 어떤 사람들은 나의 행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일까?
최근 만난 A라는 사람이 그랬다. 나의 '집순이'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집에서도 충분히 즐겁고 할 일이 많아 행복하다고 말했을 때 그의 반응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을 들이밀며 "밖에서 할 일이 더 많다"라고 단언했다.
마치 내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가치 없다는 듯 나의 삶의 방식을 평가절하하는 듯한 태도였다. 더 나아가 자신이 교회 봉사를 하며 얼마나 보람을 느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며 은연중에 나도 그런 '밖의 활동', '남을 위한 활동'을 해야만 더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처럼 압박을 가해왔다. 그의 시선과 말속에서 나는 마치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게으르고 심심한, 어딘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차가운 것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듯한 소름 끼침을 느꼈다. 나의 행복한 세계를 그가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듯한 불쾌함. 내가 애써 구축하고 소중히 여기는 시간과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그의 좁은 기준으로 하찮게 여겨지는 것만 같았다. 이것은 단순히 라이프스타일이나 취향의 차이를 넘어선다. 바로 나의 존재와 나의 선택, 나의 행복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의 부재'가 만들어낸 불편함과 깊은 상처였다.
왜 타인의 행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것일까?
왜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삶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하고 멋대로 '교정'하려 드는 것일까?
A의 말과 태도 앞에서 잠시 움츠러들 뻔했도 했지만 다행히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과거의 나는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고 '착해야 사랑받는다'는 강박 속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바꾸려 하거나 불편함을 속으로 삭이곤 했었다.
하지만 굳이 A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지 못했을뿐더러 더 이상 외부의 시선 앞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착한 호구'로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집순이 생활이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나는 그의 기준으로 내 삶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세계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행복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교회 봉사의 보람에 대해 열심히 설파했지만 나는 지역 아동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며 느끼는 기쁨과 의미에 대해 명확하게 이야기하며 내 봉사 활동 역시 충분히 가치 있음을 내보였다.
자꾸만 외부 활동을 강요하며 나의 집순이 생활을 청산시키려는 A에게 나는 집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리고 그 행복은 그 누구의 허락이나 평가도 필요 없음을 단호한 말로 선을 그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변명하거나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타인에게 투영하고 강요하는 행위는 종종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함이나 불완전함을 타인을 비난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로 해소하려 하거나 혹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옳았음을 타인에게서 인정받고 확인받으려는 강한 내면의 욕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나 자신의 경험만이 '정답'이라 여기는 좁은 시야 역시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삶을 쉽게 판단하고 평가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치와 가치를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세계를 흔드는 불안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풍요로움은 하나의 정해진 형태 속에 갇혀 있지 않다. 각기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무수히 다양한 삶의 방식과 그 안에서의 행복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해야만 한다. 행복의 기준은 외부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만족감과 평안함에 있음을 우리는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외부의 '따짐' 앞에서 나의 행복을 변명하거나 나의 삶을 축소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집순이 삶이 주는 기쁨과 성장은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다.
A처럼 타인의 행복을 멋대로 따지고, 압박하지 않는 집순이. 그게 나이다. 집순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선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나의 행복은 내가 결정한다"라고 단호히 선을 긋는 사람이기도 하다.
짧은 인생, 굳이 '착한 호구'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언제고 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진정으로 나에게 가장 착한 사람이 되을 택할 것이다.
집순이라서 행복하며 그 누구도 내 행복을 함부로 정의하거나 따질 수 없다. 나의 행복은 오직 나만이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