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소비보다 확실한 치유는 마음 쓰기이다
내가 나를 잘 알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사주, 타로, 고가의 심리상담, 관상, 그것도 아니라면 점쟁이를 찾아가면 될까?
아쉽게도 전부 다 해봤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사주가 말하길 내가 늦게 빛을 볼 팔자라는데 기가 찼다. 정해진 운명대로 살 거면 내가 노력을 왜하지? 라는 생각만 들었고 당시 상황이 꼬인 건 엄마와의 갈등인데 자꾸 엄마한테 잘하라는 잔소리만 해서 당황스러웠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금전 요구도 문제였다.)
타로는 연애, 금전 등 다양한 주제로 보았지만 무엇 하나 맞는 게 없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읊조리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고가의 심리상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심리상담할 거면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지역 내 엄청 유명한 점쟁이라길래, 점쟁이도 찾아가 봤다. 뭐 이렇다할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점쟁이가 민망해할 까봐 거짓말로 끄덕이다 나온 게 전부였다.
관상에선 내가 역마살이 있다는데, 아쉽게도 난 집순이라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역마살을 강제로 주입해도 딱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거 같지도 않았다.
이렇듯 나는 내가 '나'를 더 잘 알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써봤다. 쏟아부은 돈은 많지만,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싶었는데, 정작 가장 어려운 게 '나'를 아는 일이었다. 어떤 설명도, 어떤 진단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전부터 곁에 있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글쓰기. 아무도 없는 방 안, 조용히 펼친 노트 한 권 혹은 노트북.
내 마음속에서 들끓던 말들을 천천히 문장으로 꺼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제야 조금씩 나와 마주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과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적는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보여주었다.
왜 우울했는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왜 혼자인 기분이 들었는지. 그 모든 것의 배경에, 아주 오래된 '나'가 숨어 있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찾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명확해졌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또한 점점 더 뚜렷해졌다.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았다. 글이 멋있지 않아도, 맞춤법이 틀려도, 감정이 서툴러도 일단 썼다. 엉뚱한 곳에 쓸데없이 돈을 쏟아붇는 것보다 노트북 하나 새로 장만하거나 노트 한 권을 사서 글을 써보는 게 '나'라는 사람에 관해 알아가는 데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처음엔 감정 해소가 된다면, 서서히 감정이 회복되면서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 보인다.
남들에게 하고 싶지만 차마 못했던 말을 글로 풀어내면서 나라는 존재를 돌아보게 된다. 점쟁이를 찾아가 알 수 없는 미래를 묻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헛된 소비로는 알 수 없었던 '나다움'이 글을 쓰는 손끝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찾던 해답은 늘 밖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알게 해준 건 글쓰기였다.
마음이 울적하고 기댈 곳조차 없는 날엔, 노트를 펼치거나 키보드를 두드려보자. 그 안에 진짜 ‘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문장일지라도 호흡이 길면 지치기 마련이다. -이정현, 달을 닮은 너에게
● 길을 걷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진다. 오솔길을 걷는 그에게 다른 인물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
● 오로지 경험을 통해지식을 얻을 수 있단다. 너는 이 땅에 오래 살면 살수록 더 많은 경험을 얻게 될 거야. -L.프랭크 바움, 오즈의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