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장기적인 여정임을 깨닫자
내 큰 딸애가 드디어 시험을 다 치렀다. 주말에도 학원에 가서 4-5시간씩 공부를 하며 준비해 온 터라 내 기분까지 홀가분해졌다.
어제, 밤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 큰 딸애는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었다. 아마도 시험이 끝난 직후 하교하고 나서는 친구들과 모여 놀다가 저녁 늦게 돌아와 밥을 먹고 그제야 채점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시험 어땠니?
아이는 말이 없이 하던 일에 몰두 중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아이에게 다시 묻는다.
점수가 생각처럼 잘 안 나왔니?
아이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내 방으로 돌아와 페이스북 쇼트커트 영상을 보는 중에 아이가 내 방에 들어왔다.
시험 점수가 나왔는데....
나왔는데?
잘한 것부터 이야기해 줄까, 아니면 못 본 거부터 이야기해 줄까?
잘한 것부터?
음... 국어가 - 점이고 과학은 -점이야.
아이는 수줍게 말했다. 두 과목은 간신히 80점을 넘긴 모양이었다.
그다음엔?
내가 물었다.
수학이 77점이고 영어는 55점이야.
어.... 어? 나도 모르게 순간 입이 꾹 다물어졌다. 이럴 땐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 점수에 나, 놀랐다. 학교 다니면서 그런 점수를 맞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내 아이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있어서였을 수도 있으리라. 55점이라.... 우선 그 숫자에 당황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생했어, 우리 아가. 열심히 한 것을 생각하면 점수는 그리 안 나왔네?
아이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때, 이런 천진난만한 미소라니! 내 아이답다.
뭐, 공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겠지.
맞아. 활리 영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근데 수학은 좀 의외다.
솔직히, 수학 점수는 예상치에 훨씬 못 미쳤다. 수학 학원을 다닌 지 반년이 넘고, 수학 선생님이 꽤 신경을 써서 아이를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런 걸 감안하면 77점은 솔직히 실망스러운 점수였다. 나는 애써 내 감정을 숨긴 채 아이를 위로했다.
아주 기다란 도미노에 맨 앞에 놓인 작디작은 상자 하나가 넘어졌을 뿐이야. 이제 시작이잖아. 수천 개 상자가 넘어져야 할 텐데 실망하지 마. 활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
아이는 나와 몸을 떨어뜨리고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내 방을 나갔다. 속상한 건지, 아님 힘을 얻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실망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내 아이의 성장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내 아이는 글을 또래 아이와 비교할 수 없이 잘 쓰는 데다 피아노 실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예민하다. 정의롭고 바르고 겸손하다. 나는 내 아이에게 만 점을 주고 싶다. 단지 수학과 영어 점수가 낮게 나왔을 뿐이다. 아직은 어린아이지 않은가?
보통의 부모 같으면 실망감 때문에 야단을 치거나 속상함을 말로 드러냈을지도 모르지만, 내 방식은 다르다. 교육은 긴 여정이다. 게다가 어느 한 가지 영역으로 판단할 수 없다. 내 아이는 다면적인 성장 중이고, 골고루 제대로 적기에 발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학습이란 시간에 비례한다. 내 아이는 조금 늦게 시작했고 절대량이 부족하나 태도 면에서 흠잡을 게 없다. 서너 시간쯤은 거뜬히 버텨 내고 엉덩이를 붙여 앉아 스스로 탐구하고 열정적으로 몰입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영어 55점, 수학 77점. 활리야, 괜찮아. 너에게 시간은 충분하단다. 기회는 열려 있고, 이 세상은 만만하지 않지만 너의 태도와 열정이라면 무엇이든 부수고 박살내고 전질할 수 있어.